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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시작된 후 6일 만에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그 후의 대대적 종교적 학살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림은 학살에 참가하는 남자가 수녀가 된 옛 애인과 작별하는 모습이다. J. E. 밀레이, 1851년.
이제는 모든 위그노가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25일 국왕의 살육 중단 명령이 내려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살육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1개월여에 걸쳐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이 살육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인간이 처음 서로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양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굶주리고 있는데 상대방은 많은 열매와 곡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돌을 들게 만들었을 테니까. 그 다음에는 땅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진 자를 보면 우리 속담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역사는 권력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로 군림하기 위해 말을 듣지 않거나 위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칼을 꽂아야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안타깝게도 종교인 듯하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외쳤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한결같이 평화의 길보다는 폭력의 길을 선호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석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폭력이란 게 목전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지한 인류의 행위라는 점에서 이해는 간다. 그러나 종교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종교전쟁에 참여해 상대방의 심장에 창과 칼, 총부리를 대는 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믿기나 하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축일의 대학살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1980년에 일어난 가장 잔악한 광기의 발현인 광주학살을 연상시킨다. 사전에 치밀하게 학살을 계획했다는 것과 아울러 집권층의 이익을 위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이용했다는 점, 나아가 피해를 입은 계층이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 전기를 마련했다는 면까지 참으로 흡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앞의 학살이 종교를 내세운 반면 뒤의 학살은 권력을 내세웠다는 점인데, 사실 알고 보면 앞의 학살도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으니 종교는 그를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가톨릭만 있을 때도 끊임없이 종교를 내세운 폭력이 역사를 장식했는데, 이제는 그에 반기를 드는 형제가 생기지 않았느냐 말이다. 본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이 더 큰 법이다.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는데, 프랑스인들은 신교도를 위그노라고 불렀다. 위그노란 말이 어디서 어떤 근거로 생겨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이후 프랑스 각지에서 위그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이 강한 프랑스에서 그들이 자리를 잡기란 쉽지 않았고, 대부분의 감옥은 위그노들로 만원사례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러나 칼뱅파에 속하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었고, 위그노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Gaspard II de Coligny) 장군은 프랑스 정부를 도와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이는 위그노와 정부와의 화해를 꾀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치는 가톨릭교도인 기즈 가문이 세워 놓은 콜리니 암살 계획을 승인했다. 콜리니 암살은 1572년 8월 18일, 카트린의 딸 결혼식 과정에서 실행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훗날 앙리 4세가 될 신랑 나바라의 엔리케는 위그노였고, 따라서 프랑스 전역의 위그노들이 파리로 모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위그노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진상 조사에 나섰는데, 카트린 드 메디치 또한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은 ‘위대한 메디치’의 증손녀로서,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부모를 모두 잃고 만 그녀는 여러 수녀원을 전전하며 교육을 받은 끝에 정숙하고 교양 있는 처녀로 성장했다. 사실 권력을 소유한 가문 출신 상속녀의 장수를 바라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고, 그만큼 그녀의 생존력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운 능력은 결혼 후에 더욱 빛을 발했다.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된 앙리 2세와 결혼한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 여성을 곱게 보지 않는 프랑스 내에서 꿋꿋이 살아남았고, 자신의 세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여왕에 오를 매리 스튜어트를 자신의 육아실에서 키워 자신의 장남과 혼인시키기도 했다.
이런 그녀가 위그노 몇몇의 분노에 고개 숙이겠는가? 그녀는 아예 이 기회를 이용해 콜리니뿐만 아니라 모든 위그노 지도자들을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8월 23일 밤, 샤를 9세의 승인까지 받아낸 카트린 드 메디치는 루브르궁으로 파리 자치 지역 요원들을 소집했고, 이튿날 새벽 생 제르망로세루아의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먼저 기즈의 눈앞에서 콜리니가 학살되었고, 이후에는 신랑을 따라 나바라에서 온 하객들이 변을 당했는데, 그 와중에 신랑이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이후에는 위그노들의 집과 상점이 대상이었다. 이제는 모든 위그노가 살육의 대상이 된 것이다. 25일 국왕의 살육 중단 명령이 내려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살육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1개월여에 걸쳐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이 살육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이 학살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기념 메달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위그노들을 완전한 복종으로 이끌기보다는 가톨릭에 대한 증오와 적대적 감정만 야기하게 되었고, 이후 위그노들은 왕권에 복종하라는 칼뱅의 가르침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