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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죽었다"의 뜻 | 니체 | 3분 정치철학
      "신은 죽었다"의 뜻 | 니체 | 3분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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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시간인데 정말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하셨네요 대단하세요 현재의 무신론 학자들도 니체의 말은 잘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니체는 현대인들의 도덕관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VtZ1GFQjz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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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자 김상욱이 생각하는 종교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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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사람들도 알아야 할게 있는데 비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서로에게 제대로 된 얘기를 하려면 당장 선입견과 혐오부터 없애야함 특히나 혐오는 요즘 사회에 가장 큰 악인데 혐오를 너무 당연히 여기게 되고 혐오를 너무 잘 표출하게 됨 ↓https://www.youtube.com/watch?v=asGKOTRTobE&pp=ygUQ6riw64-F6rWQIOygleumrA==

    • 종교별 사후세계 (full ver.)
      종교별 사후세계 (full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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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든, 그 어떤 종교에서든 한 곳에서만 교육을 받으면 세상을 딱 그만큼 밖에 못 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 있던 수많은 인간 문화를 공부하며 사후세계, 종교적 규례들에 대해 조금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죠.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유튜브를 통해 그런 접근을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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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 실존의 삼단계)

      • 무명의덕
      • 2024.01.08 - 08:20 2024.01.08 - 08:13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1. 들어가는 말

         

       한창 육아예능이 유행하는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시청하고 있다. 하지만 육아예능에 대한 비판도 여럿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육아의 모습과 현실 속에서 육아의 모습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감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쾌적한 아파트에서 여유롭게 여가활동을 즐긴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음식들을 먹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노력한다. 아이들이 울고 떼쓰고 힘겹게 만드는 갈등마저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육아하는 젊은 부부들의 일상은 어떠한가? 결혼을 포기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어려운 결단을 가지고 결혼을 한다. 아기를 키울 쾌적한 아파트도, 여가활동과 다양한 체험활동을 경험시켜줄 경제적 여유도 없다. 건강식을 먹일 수 있는 재정적 여유뿐만 아니라 만들어줄 시간적 여유도 없다. 어디 괴리감은 부모들만의 아픔인가? 매체에 노출되어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우울감과 불안감, 공허함을 안겨주었다.

        계몽주의사상이 이와 같았다. 데카르트부터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이며, 과학의 발전으로 풍요로우며, 이성의 진보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보편’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존재는 윤리적이고 풍요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여전히 불안하고 절망하고 공허한 삶, 가난한 삶을 살았다. 보편과 개별자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본질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되었으며 본질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많은 질문이 등장했다. 이것이 ‘실존주의’사상이다.

        우리는 본 글을 통해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에르케고르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적으로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겪은 절망과 우여곡절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키에르케고르의 주요사상인 ‘실존의 3단계설’을 살펴볼 것이다. 이는 본질이 소외된 존재가,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설명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핵심개념인 ‘역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의 철학방법을 질적 변증법, 역설의 변증법이라고 한다. 이 ‘역설’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이며 모든 저서 전반에 녹아있다.

     

    2. 키에르케고르의 생애

     

       쇠얀 오뷔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5월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구 시내의 중심지인 뉘토어 2번지에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의 삶은 큰 영향력을 끼친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두 사람은 그의 부친 미가엘과 그의 영원한 사랑이었던 레기네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 미가엘은 본래 굉장히 가난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국가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교구교회의 부속영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미가엘은 근면성실하게 일했으며 친척의 유산상속에 힘입어 모직물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아버지 미가엘은 첫 아내와 결혼 2년 만에 사별했으며 집의 하녀 여인 쇠얀스대더 룬과 재혼했다.

       미가엘은 40살 중반부터 사업에서 은퇴하고 종교와 독서에 몰두했다. 그리고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광기에 가까운 종교교육을 자녀들에게 했다. 미가엘은 키에르케고르를 데리고 ‘실내 산책’을 했다. 집안을 거닐면서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다. 미가엘은 학자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독서량과 그의 논리적인 언사로 이미 학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지식인이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미가엘의 지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 동시에 그의 부친으로부터 종교적 의식도 영향력을 받는다. 미가엘은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가 어린시절 가난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재혼의 과정에서 아내에게 폭력적인 성관계를 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가엘에게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아들에게 늘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으라고 강조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830년 17살의 나이에 코펜하겐대학 신학부에 들어갔다. 여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1832-34년 잇달아 두 사람의 누이와 작은형, 그리고 모친이 죽었다. 늘 죄책감에 싸여있는 키에르케고르의 부친은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했다. 모친의 죽음은 키에르케고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키에르케고르는 신학은 뒷전으로 하고 문학과 음악 연극으로 그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그의 관심은 관능의 대상인 돈 후안과 회의 정신을 대표하는 파우스트, 절망의 구체화로서 영원한 유대인 아하스베루스였다.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 이것은 아버지 미가엘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 속에서 참회의 심정으로 아들에게 지난 모든 과거를 말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현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 미가엘의 진솔한 고백은 키에르케고르의 삶을 다시 한 번 흔들어놓았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파멸의 길’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가족을 위한 참회의 제물로 드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후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

        부친 소천 후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깨달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학국가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9살이나 어린 레기네 올센에게 청혼을 하고 약혼을 한다. 하지만 그 다음해 그는 그녀와 약혼을 파기한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충돌’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녀는 직접적이고 미적인 종교성을 가진 반해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약혼을 파기했다. 그의 유명한 모든 작품은 오직 한 사람의 독자, 레기네에게 바쳐졌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참회의 제물로 바쳐진 자신의 삶으로 레기네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3.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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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미적실존

     

       미적 단계란 미적인 것을 사람이 그의 삶의 원리 또는 목적으로 삼는 생활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미적인 것의 탐닉을 거쳐서 그들의 삶을 시작한다. 감각 자체에 완전히 몰두해있는 미적인 것은 인간의 심연에서 아직 표출되지 못한 채 잠재되어 있는 내면성의 예감이다. 미적인 것은 음악을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숭고한 감정에서 낭만주의에서 기인한 성애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나날이 즐겨라”를 모토로 하는 순간적 향락적인 생활, 즉 순간적인 쾌락을 찾아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동요하는 지속성 없는 생활을 보낸다. 미적 실존은 실존의 가장 직접적이고 낮은 단계이며 향락하는 실존이다. 순간적 향락이야말로 이 실존의 최고의 목표가 된다. 순간적인 미나 쾌락을 추구하여 끊임없이 부동하고 동요하는 생활태도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인생의 모든 쾌락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돈 후안이 1003명의 여자를 차례로 유혹했듯이 결코 한군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새로운 쾌락의 가능성 속에서 부동하며 재치 있게 삶을 향락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적 실존은 그 핵심을 윤작에 두게 된다. 한 땅에 해마다 같은 작물을 심으면 수확이 떨어지므로 농부는 작물 종류를 바꾸어 경작한다. 이처럼 변화를 구하는 데서 우수를 잊고 권태를 쫓으려는 데 미적 실존의 본질이 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참된 자기를 가지려는 생활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이끌어낸 ‘에로스적인 것’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충동적인 성애를 승화해서 영적으로 완벽한 신의 세계를 향해 가고자하는 욕망이다. 하지만 미적 실존은 불완전한 향락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절망의 상태로 이끌고 간다. 미적 실존은 자기 이외의 것,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을 추구하는 생활이기에 필연적으로 절망으로 끝나게 되고 그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이 한계선상에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의 경계인 ‘이로니(Irony)’가 나타난다. 즉 향락을 모토로 하고 쾌락을 추구하던 주체는 도리어 자기가 구하기 위한 노예로 전락했음을 깨닫게 되며, 마침내 자기 부정적인 것의 존재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마음 속 깊은 ‘뉘우침’이 일어나고, 사람은 참 자기, 곧 윤리적 실존에 눈뜬다. 그리고 이 눈뜸의 계기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감성적, 직접적 자기에게 밀려 무시되었던 양심이며, 이 양심의 눈뜸과 함께 미적 실존은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간다.

     

    3-2) 윤리적 실존

     

       미적실존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자기의 외부에 있는 향락의 대상을 선택한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의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미적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윤리적으로 살 것이냐고 하는 실존의 선택이며, 선택의 순간이 실존에 대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윤리적인 것에 대한 엄격한 표현이다. 즉, 미적 실존에서 자기를 추구하던 것이, 자기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모순을 직면하는 순간 절대적 자기가 반성적, 의지적 결단에 의하여 윤리적 실존을 선택된다.

       “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윤리적인 것인 한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인 한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언제 어떤 순간에나 타당한 것이라 하겠다. 윤리적인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적으로 머물러 있고, 자신의 텔로스라고나 할 것을 자기 바깥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자신이 자신의 바깥에 가지고 있는 일체에 대한 텔로스 인 것이다.” 개인은 뉘우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동시에 가정으로, 인류로 돌아간다. 이렇듯 윤리적 실존은 자기의 참 자기됨이며 관계에서의 구체적인 자기이다. 이제 윤리적 실존에게는 타자와의 관계가 절대적인 것이 되며 인격은 보편자와 개별자와의 통일로 된다. 윤리적 실존의 과제는 보편인이 되는 것이다. 윤리적인 것의 언표가 언제나 보편적 명령의 형식을 띠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편은 개별자를 떠나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윤리적 실존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 재능, 성향, 충동, 정열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일정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 자로서 어떤 특정한 주위 세계의 특정한 소산으로서 자기를 의식하고 그렇게 의식함으로써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실존은 아직도 이상주의적임을 못 면한다. 그것은 미적 실존을 떠날 때 뉘우침에서 출발했으며, 절망의 심연 속에서 뉘우치고 스스로의 양심에 입각한 영원한 자기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적 가정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가 엄밀한 의미에서 윤리적일 수 있으며 자기의 의무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인가? 성실하면 할수록, 양심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지운 과제의 엄숙한 요청 앞에 자신의 무력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개별자는 보편적인 것 속에 자기의 텔로스를 가지는 개별자이고, 그의 윤리적인 과제는 자기 자신을 항상 보편적인 것 속에 표현하고 자기의 개별성을 지양하고 보편적인 것이 되는 일이다. 이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자기의 개별성을 주장하려고 하면 그 순간 개별자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의 죄를 승인하지 않고서는 다시 보편적인 것과 화해할 수 없다.”“개별자가 보편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도 개별자로서 자기를 주장하려고 하는 충동을 느낀다면 그때마다 개별자는 유혹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뉘우치고 또 개별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보편적인 것 속에 몰입함으로써만 이 유혹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 여기에 윤리적 실존의 한계가 있다. 뉘우침에서 출발한 보편성의 윤리는 부정되고 죄의 사실을 승인하는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개인은 자신의 의지로 윤리적 삶을 살 수 없는 가운데 후모르(Humor)를 보게 된다. 윤리적 실존의 경계인 후모르에서 유한자가 가지는 역설을 인정하고 이 역설에 사는 것이 신앙이요, 신앙을 가지고 살 것을 결단하는 것이 종교적 실존이다.

     

    3-3) 종교적 실존

     

    3-3-1) 종교성A : 윤리적-종교적 단계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한계는 상당히 유동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윤리적 선택에 있어서 실존자의 정열을 자기 자신, 개별자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뉘우침에 의하여 윤리적 실존의 한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뉘우침을 최고의 윤리적 모순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또한 종교성 A영역, 윤리-종교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키에르케고르가 분류하는 종교성 A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진리를 구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있다. 종교성 A의 이상은 인간에게 신 또는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고, 개별자가 스스로 이것을 재발견하여 새로운 자아를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윤리적 실존은 윤리적인 것(보편적인 것)에다 자기의 내면성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 또는 영원을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종교성 A는 실존 구조상으로 그 본질에 있어서 윤리적 실존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윤리적 및 윤리-종교적 영역이라는 표현과 함께 종교적 영역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이 윤리-종교적 영역은 이교 속에도 있을 수 있는 종교성 A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고, 이것과 명료하게 구별되는 것은 역설적 종교성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종교성, 종교성B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사사 입다를 종교성 A에 속하는 인물로 본다. 그는 종교적 행위로 딸을 죽였지만, 그 목적은 보편적인 인류를 향하는 것이었다. “비극적 영웅(입다)과 아브라함의 차이는 쉽게 눈에 띈다. 비극적 영웅은 아직도 윤리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윤리적인 것의 표현인 텔로스를 윤리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두고 있다.” 그의 종교적 행위는 윤리적 범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종교성 A에서는 종교성이 윤리적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종교성A에서 “주체성이 진리이다.”라는 명제는 성립한다. 내면의 영원한 것은 개별자를 윤리적인 존재, 보편적인 존재로 살게 한다. 그는 늘 내면의 신적인 것과 관계함으로 늘 자기를 비우며, 자신의 정신이 진리를 지향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것, 무한한 것과 관계하는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이 실존에서 갈등이 생긴다. 그는 “절대적 목적에 대해서는 절대적 목적으로 관계하는 동시에 상대적 목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된다.” 즉 내면의 종교적인 것, 무한한 것과의 관계와 현실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 사이에 갈등과 반성이 있다. 이것은 고뇌로 표현된다. 개인은 고뇌 가운데 ‘죄’를 뉘우침으로 ‘죄책’을 깨닫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죄책을 느끼는 윤리적 실존을 두고 종교성A의 실존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성A는 그가 궁극적인 실존의 성숙으로 보는 종교성B의 전단계로서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특성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특히 종교성A는 죄책을 통한 윤리적 실존의 심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성A에서의 자기는 여전히 자기의 폐쇄성을 보이는 정신이다. 종교성A의 정신은 자기 자신과 끝없는 자책의 방식으로 관계하는데, 이러한 자책의 순환적 반복이 가능한 이유는 정신의 영원성이다.

         

    3-3-2) 종교성B : 역설적-종교적 단계

     

       고뇌는 사람의 눈을 날카롭게 하며 반성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개인은 고뇌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죄를 지었음을 안다. 고뇌를 통해 사람은 자기의 죄책을 깨닫게 된다. 죄책의 의식이 깊어짐에 따라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죄’에 대해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체성은 비진리라고 하는 인식과 함께 죄책은 ‘죄의 의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죄의 의식과 더불어 사람은 비로소 엄밀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곧 종교성B에 이르게 된다.

       종교성 A에서는 자기 심화의 일환으로 윤리적 종교, 내면의 종교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동시에 진리는 자신의 외부, 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질적 차이와 절대적인 거리가 있다. 이 양자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바로 종교성 B, 그리스도의 역설이다. 시간 안에 들어온 영원자, 개별자로서 시간 안에 태어나고 자라고 죽은 신을 사람의 한갓된 이성은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은 이것을 절대적인 타자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 이 때 개별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모순 속에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이 없으면 아브라함은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요컨대 믿음이란 것이 영이나 무로 변모되어 제거되고 말면 뒤에 남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잔인한 사실뿐이다. 이 사실만을 흉내 낸다는 것은 믿음을 갖지 않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주 쉬운 일이다.”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같아질 수 있을 뿐이지 살인을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자는 절대자와 마주하기 위해 ‘보편’을 넘어서는 비약을 경험한다. 전혀 윤리적인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도약, 죽음의 비약을 감행해야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믿음의 기사)을 입다(비극적 영웅)와 비교한다. 비교의 핵심은 윤리적으로 아브라함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설명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단념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얻었다. 체념을 통하여 저 돈 많은 젊은이는 가진 것을 모두 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체념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믿음의 기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부조리한 것의 힘을 통하여 당신은 한 푼도 남김없이 되찾을 것입니다.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부조리의 힘’으로 가능하다. ‘부조리의 힘’은 이삭을 바쳐도 다시 돌려받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믿음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체념’을 넘어서 종교적 행위로 나아가는 근원적 힘이다. 이는 전적인 의지이자 전적인 순종이다. 이것은 보편을 넘어 ‘절대적 상이성’을 가진 존재 앞에 마주할 때 가능하게 된다. 개별자는 ‘시간 안으로 들어온 영원한 존재’를 오직 믿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 때 개별자는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된다. 오로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무한자’는 ‘유한자’로 변형된 것에서부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인간은 ‘무한자’가 놓여야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한다. 이로 인해 자기됨의 탈구축과 재구축이 이루어진다.

     

    4.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의 개념

     

       키에르케고르에게 역설은 우선 사고의 본질적인 성격, 곧 지상적 삶의 고유한 파토스로서 규정된다. 즉 역설은 사고의 열정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최고의 정열, 곧 사고의 최고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고의 최고의 역설은 자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진리를 향한 열정이다. 역설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고 가운데 있는 것이며 특별히 자기 인식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오성은 자신을 자명한 것으로 믿고 출발한다. 즉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 정렬이 눈을 뜨게 되자 오성은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모르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인간의 본질적 사고에 있어서 역설은 개인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적실존이든, 윤리적 실존이든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개인은 늘 자신을 잘 모른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오성이 ‘알려지지 않은 것’과 충돌함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불확실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신’ 이라고 부른다. 오성은 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본질, ‘존재 그 자체’ 를 추구한다. 그러나 존재는 증명을 고집하는 동안에 나타나지 않는다. 무슨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즉, 우리의 관념으로 본질을 알아가는 순간 본질을 올바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증명에서 손을 떼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는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짧은 순간은 확실히 하나의 비약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이렇게 규정한다. “그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다다르는 한계이며 이러한 그것의 운동의 규정을 정지의 규정과 바꾼다면 상이한 것,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즉 오성과 충돌하는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절대적 질적 차이를 가진 다른 존재이다. 이것은 진리와 비진리의 상이성이다. 오성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봉착한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진리는 인간 밖에 있다. 인간은 오성이 나아갈 수 없는 절대적 상이성이라는 역설을 가진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 절대적 상이성의 원인은 인간의 허물에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죄’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이 ‘죄의 의식’이 없으며 이것은 오직 신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죄의 의식’을 가르쳐주기 위해 인간과 동등하게 된다. 무한자가 유한자가 되었다.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우리와 동등해졌다. 이것을 절대적 역설이라고 한다. 이 역설은 이중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 부정적으로는 죄의 절대적 상이성을 드러내며 긍정적으로는 절대적 상이성을 지양하고 절대적 동일성으로 왔다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전반을 살펴보았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서 신 앞에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여파로 그는 사랑하는 ‘레게네’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에서 서성거리며 살아간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그는 ‘레게네’를 포기했다. 이것은 신 앞에서 결단한 그의 신앙적 결심이었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아브라함과 같이 ‘침묵’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오직 ‘신 앞에 단독자’로 설 때만 자기 자신의 참된 ‘자기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변화하고 유한한 것으로부터 쾌락을 얻는 미적실존을 넘어서, 세상의 보편이라고 이야기하는 ‘윤리적’ 단계를 넘어서 오직 자신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만 본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됨’의 본질이다. 본질로 나아가기까지 3가지 역설의 과정을 거친다. 첫째는 내가 나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 안에 나의 본질이 없으며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 나의 밖에 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절대적 상이한 존재가 절대적으로 동일한 존재로, 무한자가 유한자로,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오직 그것과 마주함으로 인간은 ‘자기됨’을 찾아간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실존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타종교나, 무종교인 사람에게는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의 사상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신앙 안에서 누구보다 세밀하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신앙인으로 하여금 자신은 어떤 실존에 머물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하며, 윤리적인 삶과 신앙인의 삶이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는 척도가 되어주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결단을 그의 ‘아픈 사랑’과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침묵’을 고수한다. 이로 인해 그의 삶과 사상의 연관성을 단정 지어 알 수 없지만, 신의 부르심 앞에 ‘침묵’과 삶으로 응답해야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신 앞에 단독자’로 설 때 ‘나의 나됨’을 온전히 알 수 있으며, 신의 부르심에 침묵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삶이 바로 ‘자기다운 삶’이다.      

         

     

    참고문헌

    -쇠얀 키에르케고르 , 『공포와 전율』 (임춘갑 역, 서울: 도서출판 치우, 2011)

    -표재명 ,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서울: 도서출판 치우, 2012)

    -차 건 , 『키에르케고어의 죄론에 대한 비종교적 재구성 :한국 기독교의 신앙성찰을 위하여』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매튜 D. 커크패트릭  『쇠얀 키에르케고어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정진우 역 서울: 비아, 2016)

    -안상혁 , 『불안, 키에르케고어의 실험적 심리학』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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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시간 전
    • 기독교는 가난의 종교야 논할필요도 없이 눈물흘리고 가난하고 고통받는이의 종교고 하나님께서 직접 그것들을 체험하시고 모범이되셨다 이렇게 간단한건데 칼x의 잡스런 논리와 한국 무속의 구복들이 뒤섞이니 상처받는 가나안신도들만... N
      23시간 전
    • 아 한국에는 이런 목사님들이 많아야 하는디
      08.30
    • 나도 이해가 안됩니다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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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29
    • 제 사촌형은 감리교단 목사입니다. 형도 한때는 대형교회에서 ‘월급 목사’로 일했지만, 그들의 돈과 권력 중심적인 행태에 진절머리가 나 결국 사역을 내려놓고 작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 교회 월세조차 감당하기 힘들고, 지금은 형수님이 일하며 그 월세를 대신 부담하고 계십니다. 형은 늘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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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29
    • 저도 그런 느낌 많이 받아서 교회 안나갑니다
      08.29
    • ㅊㅊ
      08.29
    • 여기 대부분은 교회에서 상처받고 가나안이 된 교인들이 많아요 이해해주세요 목사님
      08.29
    • 맞음 거기 사탄교임
      08.29
    • 저런짓하는 목사들 지가 사이비 교주인줄 모르더라 에휴... 걍 뒤졌으면 좋겠다
      08.24
    •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알사람 다 아는곳임 내 주변사람들도 거기 가지말라고 여자따먹고 노는 병신 사교집단이라고 함
      08.24
    • 그 대전에 있는 교회 어딘지 알겠다. 거기 유명해
      08.24
    • 사이비 맞아
      08.24
    • 내용은 하나두 없고 그냥 욕만 남기셨네 ㅋㅋㅋ 사연이 있었다면 스토리 좀 남겨주세요. 경험담
      08.24
    • 개독한테 쎄게 물리셨나보네 ㅋㅋㅋ
      08.24
    • 종교를 갖지마 이게 현명한거야
      08.22
    • Pd님 고생이 많았는것 같네요 홀쭉
      08.22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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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비와 이단은 자신들이 정통이라 주장하며 진짜 정통을 이단으로 몰아세웁니다. 그 과정에서 교인들은 가스라이팅, 세뇌, 권위주의에 길들여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습니다.
    교회는 완장 찬 이들이 타락한 질서를 ‘신의 뜻’으로 포장하는 공간이 되고, 신도들은 맹목적인 복종을 믿음이라 착각하게 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목사는 교인의 삶을 통제하고, 정신적·경제적 착취를 일삼습니다. 헌신과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비판적 사고는 억눌립니다.
    그러나 복종은 미덕이 아닙니다. 신앙이 아닌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자유는 복종이 아닌 저항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부패한 교회를 비판했고,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출했으며,
    프랑스 혁명과 일제 강점기 순교자들은 체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저항이 오늘날의 자유를 만들었습니다.

    자유는 순종하는 자가 아닌, 의심하고 떠나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복종하는가?’
    ‘이것이 정말 믿음인가?’

    생각을 되찾고, 종교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진짜 신앙이며,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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