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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좋은 곳이면 왜 지금 죽지 않는가?
O Death, Where Is Thy Sting?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알렉산더 슈메만
보라. 눈밭에서, 태양에서, 가장 높은 들판에서,
잔디의 물결과 흐르는 구름이, 바람이 속삭이는 하늘이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 찬미하는지 들어보라.
그들의 이름, 삶을 위해 싸운 그들의 이름,
가장 뜨거운 불꽃을 가슴에 품었던 이들의 이름,
태양에서 태어나 태양을 향해 가는 짧은 여행
명예를 새겨 넣은 색색의 공기를 남겼나니.
- 스티븐 스펜더 Stephen Spender
죽은 이후를 상상해본적이 있는가?
다들 한번씩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많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듯이 다음 세상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영혼 따위는 없으며, 그저 소멸될까?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나는 죽음이 두려운 사람이다.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망과 부활은 매우 핵심적이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죽음으로 부터의 승리가 없었다면,
나는 과연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만약 사망을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삶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삶의 귀결이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적수 앞에서 그 무엇이 의미있다 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의식에 있는 질문, 종교와 하느님, 신앙에 관한 질문은 결국 죽음의 문제와 바로 이어져 있다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15p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질문을 가져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데 썼다. 죽음 이후의 실존을 생각할때면, 마치 공황장애가 온 것 처럼 숨 쉬기가 어렵고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전에는 말이다.
이 죽음 이후의 실존에 대한 논의는 과학적이지도 않고(관측이 불가능하므로), 긍정적이거나 자명하지도 않고, 증거도 없고, 찬반 양론으로 대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수천 년간 격렬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이 논쟁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논의가 반복될수록, 양 극단의 관점만 강화되어왔다. 불확실한 사후세계를 선호하며 이 세상을 거부하거나, 이 땅의 유토피아만을 그리는 광적인 유물론으로 죽음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뭔가 다를까? 우선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명확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편안하게 죽음에 대한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을 주는건 아니다. 단지 우리를 한 가지 질문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최후의 원수]
죽음 앞에서 모든것이 의미를 잃는다. 천천히 스며드는 독과 같이 잠식해오는 죽음은, 정말이지 공포스럽다. 그래서 나는 죽음 이후의 삶에 우리의 희망을 두려는 유혹에 쉽게 휩싸이곤 한다. 영원한 기쁨, 영원한 승리가 있는 그곳을 바라고, 죽음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떠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만족스러운 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을 모른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고전15:26, 새번역]
그리스도의 고난과 핍박, 죽음… 또한 이어진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성도를 향한 증오가 끓어 넘치던 시기에 바울이 써 내린 한 문장. 이 관점은 우리에게 다른 차원을 열어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멸망 받아야 할 원수’다. 플라톤이 말했던 사망을 사랑해야 하며, 사망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보셨을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친구(나사로)를 되살려내신다. 만약 죽음이 더 좋은 곳으로의 해방이라면, 왜 다시 이 끔찍한 세상에 살려내셨겠는가. 왜 다시 생명으로 친구를 회복시키셨겠는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다. 이곳에는 굉장히 역설적인 선포가 있다.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는다!”(27p).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야 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삶과 죽음이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죽은 후의 세상이 대립하는 양상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은 ‘영혼 불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가 아닌, “어떻게 죽음을 승리하였는가?” 에 있다.
과연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만을 이야기할까? 이 지긋지긋한 육신에서 벗어나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분주하고 악하고 끝없이 채찍질하는 이 세상에서 자유하는 것일까? 이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것이지만, 과연 성경도 동일한 것을 이야기할까? 만약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후의 그곳이 정말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왜 바로 가지 않는가? 최대한 위험한 곳에 선교를 가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분은 죽음과 투쟁하고 계셨던 것이다. 죽음을 인정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으셨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불쾌하고 뒤틀린 일이었다. 죽음은,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였다.
외경인 지혜서 1:13에서는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피조 세계에 하나님으로 비롯되지 않은, 원치 않으시는, 그분이 창조하지 않은 힘과 세력이 있으며, 그분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다. 또한 영원 무궁한 근원이시며 공급이시다. 그런데 만약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 이야기하듯이, 사망이 생명 현상의 궁극적 결론이라면,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 그분이 전하신 모든 생명과 기쁜 이야기들은 거짓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생명보다 강력한 권세를 부리고 있는가 질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이 세상은 죽을 운명에 처한 이들이 모여사는, 저주받은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는가?
죽음은 도덕 질서의 일부이자, 영적 재'앙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생명을 원하지 않았고, 죽음을 원했다. 인간은 하나님께 충성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값 없이 생명을 선물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에 충성하며, 죄에게 충성한 삯으로 죽음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인간을 다스릴 죄의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이를 원죄 Original sin 라고 부른다. 비극의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삶을 갈망하지 않기 시작한 곳에 있다.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갈망했고, 스스로에게서 삶의 목표와 목적과 내용을 찾고자 했다. 자신의 뜻과 자유의지로 자기 자신을 찾고 우선시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스스로를 섬기지도 못했다. 그들은 세계에 의존하는 노예, 죄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었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행복하게도 만들지 못했다. 생명 없이 죽음과 교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건 오직 생명 뿐이다. 죽음을 주는건 죄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잘려 나온 인간은, 죽음에 끌려다닌다. 그 인간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희망을 둔다. 그러나 오히려 이 또한 이 세계를 죽음에 내주게 되는 요인이 된다. 이 심각한 왜곡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탈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