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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본성이 드러난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천안에서 전임 전도사로 교회 일을 시작했다.
아는 목사의 소개로 가게 되었는데, 내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아주 친한 형과 함께 둘이 들어갔다.
개척한 지 몇 년 안 된 교회였다.
담임목사는 40을 갓 넘긴 목사였는데, 천안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7년 정도(정확하지 않다) 부목사를 했었다.
그 큰 교회는 부목사를 오래 한 경우에 한해 개척교회를 내어준다고 했다.
개척교회는 큰 교회의 소위 ‘나와바리’(이 용어를 쓰는 이유가 있다)에 있어야 했다.
당시 그런 교회가 6개인가 7개인가 되었는데 모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가 들어간 교회 목사에게는, 돈을 많이 들여서 아파트가 새로 들어선 곳에 돈을 많이 들여서 번듯한 교회 건물을 세워주고 따라갈 마음이 있는 교인을 보내어 빨리 독립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인원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 결과, 몇 년 되지 않았는데도 교인이 많았고 재정도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큰 교회의 나와바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때가 되면 인사를 가야 했고, 부르면 가야 했고, 신입 교역자가 와도 인사를 가야 했다.
신입은 큰 교회뿐 아니라 그 나와바리에 속한 다른 선배 목사에게도 인사를 가야 했다.
큰 교회의 목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부목사들은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목사가 외국에 다녀올 때면 모든 부목사가 마중을 나가야 했고, 오늘 길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보고했다고 한다.
부목사가 저녁예배 설교 담당일 경우, 예배 후에 담임목사 방에 불려 가서 설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 혹은 비평을 들어야만 했다고 한다.
교인들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부목사들에게는 갑질 중의 갑질을 해댄 것이다.
물론 부목사를 훈련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겠지만 말이다.
이걸 6~7년 이상 버틴 사람에게 ‘교회 개척’이란 달콤한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대신 자기 나와바리에 있는 조건으로.
큰 교회 목사에게 인사를 갔는데 별 말이 없었다.
열심히 하라는 정도였다.
꼬마 전도사를 상대할 만한 짬밥이 아니었으니까.
다음으로 그 나와바리에서 제일 선배인 목사에게 갔다.
그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담임목사의 말을 잘 들어라. 그래야 나중에 너희가 다른 교회로 옮길 때 이야기를 잘 해 줄 거다. 그 교회에서 하는 목회는 너희 목회가 아니다. 담임목사의 목회이니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 너희 목회는 나중에 너희가 담임 되었을 때 해라.”
이렇게 쓰고 보니 많이 틀린 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렇게 바꾸어 보자.
“이 회사는 사장이 세운 거야. 너희는 직원이고. 그러니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해. 너희 주장은 너희가 회사를 세워 사장이 된 다음 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가?
이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탓하라.
담임목사가 목회를 이끄는 것은 맞다.
당연하다.
담임목사는 그 교회에서 오랫동안, 때로 평생을 일 할 것이지만, 부목사는 아주 길어도 10년이고 3~4년 정도면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목사가 자기 뜻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핵심은 그게 아니다.
부목사를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종 혹은 하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사실 담임목사의 마음대로 할 수 있기는 하다.
인사권이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부목사와 전도사는 1년 계약직이기 때문에 매년 다시 임명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청빙이라고 한다.
청빙 받기 위해 담임목사가 안건을 올려야 하는데, 올리지 않으면 끝이다.
100%의 인사권이다.
부목사에 대한 인식이 ‘목회 후배’ 정도만 되어도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의견을 주고 받는 시간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목사는 오직 담임목사의 따까리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하인이기 때문에 의견을 나눌 필요가 전혀 없다.
본인의 지시를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으면 당장에 문제를 삼게 된다.
내 첫 사역지인 그 교회 담임목사도 그랬다.
그 사람은 30대 초반에 천안의 큰 교회에 전도사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보고 배우고 견뎌 개척교회를 얻어냈다.
그 곳에서만 있었으니 무엇을 배웠겠는가?
담임목사가 된 후에는 보고 배운 것 위에 자기의 인성이 더해졌다.
부교역자를 하면서 보고 배운 것이 있어도 이미 성인이요 공부를 많이 한 상태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다.
이 때 더해지는 인성이 진짜다.
이것이 핵심이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도, 선배 목사도, 내 첫 사역지 교회 담임목사도 원래 인성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성이 경험과 합해진 결과 ‘무조건 내 말을 들어’라고 하는 목사가 되어 있었다.
교인들에게는 젊고 새로운 목사라고 인정 받았을 지 모르겠으나, 그 ‘밑에서’ 일하는 교역자들에게는 자기 지시만 따르라,고 하는 독재적인 소시오패스 목사일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고 10달 정도 후에 나오게 되었다.
교인들 중에 그 목사의 독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안한 표정만 지을 뿐 행동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나 이전에 있던 여성 전도사에게도 ‘나가라’고 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홈페이지에 교회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자 어떤 여성 청년을 찍고 교회로 불러들여 마구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그 청년의 아버지로부터 듣기도 했다.
그 이후 다른 교회 두 곳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다.
한 곳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여교역자를 프락치로 이용하여 모든 남성교역자를 내보내는 식으로 정리되었다.
세 명의 남성 교역자가 12월 중순, 한 해가 보름 정도 남은 때 해고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급히 임지를 찾아 나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른 곳에서는 내가 담임목사의 독선을 견디다 못해 들이 받고 나와버렸다.
사실 다른 목사 중에는 나처럼 들이 받지는 않았지만 일하던 중간에 다른 자리를 알아보다가 나간 사람이 몇 명 된다.
이 교회 목사는 ‘시키는 대로 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이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반 회사에서도 금기시되어 있는 말을 말이다.
심지어 교회 직원에게도 했으니 어떤 사람인지 알 만하다.
그런 인간인데, 어떤 부목사를 끝까지 감싸 안기도 했다.
그 부목사는 싸움닭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목사의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에게 살살거리니 그 맛이 좋았나 보다.
지금은 라오스에 선교사라는 타이틀 팔아 이곳저곳에서 돈 받아 처먹으며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이 쓰레기 같은 놈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
내가 부목사로 일했던 세 교회 담임 목사의 나이가 거의 비슷했다.
40대 초반.
지금 50대 중반인 내가 볼 때, 40대 초반은 목회하기에는 아직 미숙한 나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큰 교회 담임이 되어 부교역자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할 수 있게 되니 그들의 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물론 교인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으니 가면을 쓰고 다르게 행동했다.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백이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담임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교회에는 이런 구조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여기에 대한 반성, 개선, 개혁을 위한 노력은 전혀 없다.
논의도 되지 않는다.
군대와 비슷하다.
하지만 군대보다 더 폐쇄적인 조직이라 그런지 군대보다 못한 조직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