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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신앙, 그리고 가나안 성도
우리가 흔히 복을, 또는 복만을 구하는 신앙을 기복신앙, 기복주의 신앙이라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체가 복을 얻기 위한 수단, 동기가 되는 것이죠.
각각의 신앙을 통해 복을 얻는 과정은 신앙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샤머니즘 이라 부르는 신앙에서의 복을 얻는 과정은 '주술'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복을 얻는 과정은 '언약'을 통해서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 역시 그 복을 얻는 과정에 관해 기술하고 이야기합니다.
복을 구하는 건, 신앙의 한 속성이 되나 기피할 무언가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복신앙이 가져다 주는 위험과 부정적인 측면을 알고 있습니다.
그 위험과 부정적 측면에 관해 여러 측면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이죠.
먼저 하나는 기복신앙이 주는 주술적 측면입니다.
주술이란 것은 간단히 말하면 불로소득과 같은 것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이라는 정의를 부정하고 적은 노동을 통해 보다 큰 소득을 얻기 위한 과정이 주술인 것이죠.
또는 인간으로서 제한된 권한과 소득을 위해 인간의 터부를 건들며 간구하는 행위가 주술이 됩니다.
고대 인간의 이성적으로 제한된 자연이해를 주술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지혜'도 있으나
대부분의 주술은 개인과 사회에 어떤 파괴적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내에서 이런 주술적 측면을 잘 드러내는 것으론 '행함 없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과 행함은 반대적 단어가 아닙니다. 나무와 열매인 것이죠.
믿음이라는 나무에 열리는 열매가 그 행함이 됩니다.
믿음으로 보이는 행함이 있는 것이고 율법으로 드러나는 행함이 있을 뿐이지 믿음과 행함이 서로 반대되는 성격의 단어가 아닌 것이죠.
보통 바울 서신에 기록된 행함은 '율법'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성경에서의 행함이 율법은 아닌 것이죠.
믿음의 반대가 율법이지 행함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은혜의 반대는 율법도 행함도 아닙니다. 은혜의 반대는 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 은헤 없이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신앙이냐 율법을 통해 자기 의를 드러내는 신앙, 공로의 신앙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흔히 후자를 율법주의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구분점이 없습니다.
성경을 단순히 문자로 보면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대립적 개념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행함을 율법으로 또는 공로로 봅니다. 넌센스인 거죠.
햄함에 대한 설교와 가르침은 교회 내 타부가 되어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니 교회 내 윤리가 사라지게 될 뿐이고요.
'행함 없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구원, 이것이 곧 주술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으로 고백되는 십자가, 예수 이름, 이건 주술을 완성시키는 주문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 기복신앙이 가져다 주는 부정적 측면은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성경은 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복은 공동체를 위한 복이 됩니다.
공동체의 비전과 소망, 또 그것을 이루길 위한 질서에 대한 개인적 보답 등이 '복'이란 단어로 표현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구하는 복은 내 개인과 가족을 위한 복이 되는 것이죠.
이게 문제인 것이고 우린 이걸 기복주의 신앙이라 부릅니다.
대부분 개인만을 위해 구하는 복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저주가 됩니다.
내 자녀의 대학입학을 위해 복을 구하면 내 이웃의 자녀가 그의 수고와 상관없이 대학을 떨어져야만 합니다.
내가 산 아파트의 집값이 오르면 내 이웃 중 집 없는 자들이 집을 얻기 위해 더욱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건 성경이 말하는 복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복이 아닌 저주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내 자녀와 모든 이웃의 자녀들이 대학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이 복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내가 산 집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집값이 떨어져 나뿐만 아니라 내 이웃들이 모두 집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을 복이라 말합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기복주의 신앙이란 나만을 위해 복을 구하는 것, 내가 잘되기 위해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세상이 잘 되고 세상이 바뀌어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복이라 말합니다.
오늘날 이런 기복주의 신앙에 여러 변종들이 생겨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가 '비전'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청소년, 청년들은 '촌스럽게' 복을 구하지 않습니다.
'비전'을 구합니다. 비전을 통해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길 간구하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이 되고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그 중심에 내가 있으면 그것이 또 다른 기복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항상 공동체적이었습니다.
공동체의 비전 속에서 내가 무엇을 감당해 내야 하는 지에 관한 기록이지 내가 잘 되고 높아지기 위해 내가 무언가가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생산된 수많은 '요셉'과 '다니엘'들이 세상의 암세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 이건 왜곡된 비전, 기복주의 신앙과 이 세상의 맘몬니즘의 콜라보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복주의 신앙의 변종 중 하나로 또한 '가나안 성도'가 됩니다.
(글을 쓰다보니 글이 길어져 글을 부득히 두 파트로 나눠 쓰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