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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예수 부활의 실존적 혁명: 길가메시에서 니체까지, 죽어있는 신을 부활시키다
해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거리마다 알록달록한 계란이 넘쳐나고, 화려한 종교 시설에서는 축제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부활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차갑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2,000년 전 유대 땅이라는 낯선 곳에서 일어났다는 그 기적 같은 사건이, 오늘 당신의 텅 빈 통장 잔고나 삐걱거리는 인간관계, 혹은 깊은 밤 뼈저리게 밀려오는 고독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매년 부활을 말하고 찬양하면서도 삶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부활을 나와 철저히 분리된 타인의 사건, 즉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만 박제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저 멀리 하늘 위 금빛 보좌에 앉혀두고 그저 맹목적으로 신격화하며 구경만 하는 신앙은 참으로 편리합니다. 내가 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오직 전능한 신으로만 가두는 것은 그를 다시 무덤에 처넣는 일과 다름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문명의 뿌리인 메소포타미아와 니체의 망치를 통해, 박제된 신을 깨우는 위험하고도 짜릿한 실체를 마주해야 합니다.
1. 신성과 인성의 중첩: 길가메시의 고뇌가 예수가 된 이유
기독교의 본질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입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양자역학의 양자 중첩과 같습니다. 관측하기 전까지 입자인 동시에 파동으로 존재하는 양자처럼, 예수는 신성이라는 무한함과 인성이라는 유한함이 한 존재 안에 동시에 중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예수를 신의 영역으로만 밀어 넣으려 합니다. 그래야 그가 겪은 고통이 나랑 상관없는 것이 되고, 내가 그처럼 살지 않아도 될 핑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문학인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를 봐야 합니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신의 힘을 가졌지만, 친구의 죽음을 보며 자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성의 한계 때문에 처절하게 고뇌했습니다.
길가메시의 이 고뇌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내 안에 신적인 갈망이 있는데 왜 나는 죽어야 하는가?"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전능한 신이 굳이 처참하게 피 흘리는 인간의 한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유는, 신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심연을 메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늘 위에서 명령만 내리는 독재자가 아니라, 직접 밑바닥으로 내려와 인간의 고뇌를 체험하고 그 한계를 돌파한 선구자입니다. 그는 신성을 유지한 채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살아내며 우리에게 증명했습니다. 신성은 저 멀리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2. 조로아스터교와 이분법의 덫: 종교 시스템의 두려움
우리가 예수를 신으로만 숭배하며 나와 분리하게 된 배경에는 페르시아에서 탄생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신과 인간을 철저히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인류 종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바로 그 이분법을 깨러 온 분입니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즉 중첩될 수 있음을 보여준 혁명가였습니다.
기존 종교 조직이 예수는 오직 신이다라고 강조하며 인간 안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통제권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를 노예 도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을 끊임없이 죄인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신 앞에 무릎 꿇게 해야 관리가 수월한데, 각자가 신의 자녀라는 거룩한 정체성을 깨닫고 당당해지면 중간 관리자들의 권위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종교 시스템은 당신이 예수를 구경하기만을 원합니다. 당신이 직접 예수가 되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진짜 부활은 니체가 말한 가치의 전도이자 해방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같은 수준의 동역자로 격상시키기 위해 죽음을 이겼습니다. 조로아스터교식의 선악 이분법에 갇혀 예수를 멀리 있는 신으로만 박제해 두는 것은 부활의 진짜 확장성을 가로막는 일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노예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초인의 시간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3.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부활
니체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부활은 고통 없는 낙원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메시가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했듯이, 우리 역시 삶의 허무와 죽음이라는 운명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십자가라는 가장 참혹한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고, 그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해 다시 일어났습니다.
신학의 지도는 부활을 이론으로 가르치지만, 니체는 우리에게 길을 걸으라고 종용합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영원 회귀), 당신은 기꺼이 다시 살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부활을 사는 사람은 바로 이 질문에 네라고 답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약함, 나의 실패, 나의 어둠까지도 모두 신성한 과정으로 긍정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창조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궤도에 올라타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성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때, 나의 이익을 포기하고 공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니체가 말한 초인의 위버멘쉬적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예수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4. 제5의 복음서: 당신의 생애가 기록되는 순간
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살아있는 복음서는 지금 당신의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써 내려가는 제5의 복음서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의 이야기가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왔듯, 당신의 삶 또한 하나의 경전이 되어야 합니다. 2,000년 전의 기록에만 매몰된 신앙은 박물관의 유물입니다. 니체는 나의 가르침을 버리고 당신 자신의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 역시 나를 따라오라고 했지 나를 숭배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오늘 겪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바로 새로운 복음서의 구절이 됩니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마술이 아닙니다. 비대해진 이기심인 에고를 죽이고, 타인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따뜻한 손을 내미는 행위 자체가 우주적인 기적입니다. 예수가 무덤을 박차고 나왔듯이, 우리도 각자를 짓누르는 무덤에서 걸어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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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라는 어두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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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복수심이라는 차가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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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이래라는 포기와 체념의 무덤
이 무덤들을 뚫고 나와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채우는 모든 순간이 당신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사후 세계를 위해 들어놓는 보험 상품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 모두가 가진 존엄한 본질을 회복하는 영적 혁명입니다.
5. 부활을 사는 법: 구경꾼에서 주인공으로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무덤 밖에서 타인의 기적을 관망하며 박수나 치는 구경꾼으로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 안의 예수를 깨워 부활의 길을 직접 개척하는 주인공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는 신입니다. 그러나 그 신은 니체가 증오했던 억압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극단까지 끌어올려 준 사랑의 신입니다. 예수를 신으로만 너무 높이 받들어 모시는 신앙은 결국 그를 당신의 삶에서 지워버리는 교묘한 방법일 뿐입니다. 당신 안에는 이미 세상을 이긴 예수의 생명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가설이 아니라 실존적 사실입니다. 이제 주저하지 말고 당신의 신성을 회복하십시오.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Amor Fati)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 찰나, 당신은 이미 부활한 예수와 한 궤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조직이 당신을 죄인이라 부르며 길들이려 할 때, 당신은 당신 안의 예수를 바라보며 미소 지으십시오. 신학적 지식이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때, 조로아스터교식의 낡은 이분법을 버리고 삶의 중첩을 선택하십시오. 당신이라는 복음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채워지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빈 페이지에 당신만의 당당한 부활의 기록을 남기시길 바랍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실존적 진실이어야 합니다. 무덤 문은 이미 열렸습니다. 이제 당신이 걸어 나올 차례입니다.
글을 마치며: 모태신앙인 또는 오랜기간 교회를 다닌 당신에게 드리는 편지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공부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이 쌓아온 그 지식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인들도, 페르시아의 현자들도, 니체 같은 망치를 든 철학자들도 결국은 하나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유한함 속에서 무한한 가치를 찾아내는 부활의 삶 말입니다.
예수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며, 경배의 대상을 넘어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당신이 배운 신학이 인간은 절대 예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면, 오늘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는 당신이 당신 안의 예수를 발견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그것이 바로 부활의 완성입니다. 당신의 남은 생애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당신 자신의 복음서로 가득 차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두권의 책을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신학자들도 매우 어려워하는 책입니다)
책을 읽기 힘드신분들은 유튜브 (일당백 : 일생동안 읽어야 할 백권의 책)
정박사님의 영상을 보는것도 매우 좋을것같습니다.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2.에릭호퍼 맹신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