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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히틀러 이후의 서구와 미국의 선택
저도 탄핵반대 집회에 참여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유럽 교회는 침묵하였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수많은 전쟁 고아, 과부가 생겨났고
교회는 그들을 보며 관점이 바뀌어 나갑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술렁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마르크스 주의가 교회로 교묘히 숨어듭니다
그 결과 유럽인들은 기독교에 아무런 기대를 안하게 되고
급속한 세속화, 탈종교화 하게 됩니다
반면 미국은
기독교 주도의 민권운동이 일어납니다
미국의 정치 이념은 자유주의로
평등보다 자유를 더 중시하는 이데올로기인데
개인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개인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권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럼에도 50년대의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로 인한 한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독교 민권운동이
그 당시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모순을 돌파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마틴루터킹 목사님)
(미국은 자연스레 교육 정규과목에 성경 낭독을 포함하게 됩니다)
50년대의 서구와 미국중 어느 길로 따라 갈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걸 해야합니다
(로*잔대회, 천주교가 지향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방향입니다)
1919년(44세)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여러 곳에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국무경, 국무총리, 대통령 등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최초의 임시정부인 노령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이 국무경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4월 초 미주 교포 사회에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의 한 미국인 신문기자가 이승만을 찾아와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이번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을 동양 처음의 예수교국으로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Ibid, p. 93). 이승만은 그 뒤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 건국 정책을 계속 드러냈다. 예컨대, 1946년(71세)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내용의 식사를 낭독했고, 1948년 5월 31일에는 임시 국회의장으로서 제1대 국회(제헌국회)를 개원하면서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하나님께 먼저 감사 기도를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7월 24일에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고 선서했다."(Ibid, p.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