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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민중론
민중신학의 민중론
최형묵
1. 민중신학에서 민중론이 차지하는 의의
민중신학의 고유성은, 그것이 민중을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민중의 자리에서 사물을 보는 시각의 고유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주제'로서의 '민중'은 제한된 과제이지만, '시각'으로서의 '민중'은 무한한 과제를 안고 있다. 민중을 특정한 성찰 주제로 하는 것과, 민중의 시각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주제'로서의 '민중'은, 그 민중이 다양한 시각에서 성찰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각'으로서의 '민중'은 민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함축한다.1)
이러한 의미에서 '민중신학에서의 민중론'이란, 민중신학이 자기의 선 자리를 확인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하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2)
그런데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의 문제는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본격적으로 '정의'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중은 특정한 개념으로 확정지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를 경과하면서 민중신학 내에서는 학문이론적 차원에서나 실천이론적 차원에서 개념 정의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그에 따른 나름의 정의들이 시도되었다.
이제 그 민중론들의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최근의 민중신학 내에서의 민중 개념 논의를 가장 본격적으로 검토한 것은 김진호의 논의이다. 김진호는 그간의 민중논의가 소외론적 접근(1세대 민중신학)과 계급론적 접근(2세대 민중신학)으로 대별된다고 밝히면서 양자의 문제점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접근을 시도한다.3) 이 강의에서는, 그간의 민중론을 재구성한 김진호의 입장을 따라 민중신학에서의 민중론의 문제를 검토하려 한다. 그러나 이에 관한 나의 견해도 피력할 것이다.
2. 소외론적 민중론
앞서 말한 대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민중사건의 주체인 민중은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민중경험' 혹은 '민주사건'에 동참함으로써 경험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실체를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개념적으로 정의하게 되면 민중은 역동적 성격을 잃고 박제화된다고 보았다.4)
그러나 1세대 민중신학에서 민중을 본격적으로 정의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실상 정의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무엇무엇이 '아니'라는 부정을 통한 정의 역시 정의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 실체를 확정하는 데는 유보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민중이 어떤 존재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는 데서도 민중에 관한 정의는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1세대 민중신학에서의 민중 개념화를 둘러싼 논의의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다소간의 편차들이 있기는 하지만, 1세대 민중신학에서 대체로 공통되는 논의의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장 완강하게 민중 개념화를 거부하는 안병무의 견해의 일단을 살펴 보자.
"'민중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 올 때, 저는 민중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요. 서구의 학문은 모든 것을 개념화해서 파악하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민중을 설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린된 것이 되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죽은 개념하고의 싸움만 남거든요. 내가 서구 사람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끝끝내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민중을 미화한다고 그러지만, 우린 민중을 美化 안 해요.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볼 뿐이예요. 민중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한 가지 점은, 민중은 '자기초월'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5)
서남동은 이와는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중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위험성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정의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민중신학 학파에 속한 신학자들 중에는 민중신학의 민중이란 것을 정의(define)하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중을 정의하면 이는 민중을 객관화시키는 것이며, 그리고 민중을 객관화시키면 살아 있는 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객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민중의 개념 정의를 거부하는 신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민중 스스로 자기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지 의식적으로 정의하면 굴레를 씌우는 것이 되므로 안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의미있는 말이고 또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위험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일단 학문의 영역에서는 정의를 내려 보지 아니할 수 없다."6)
이러한 입장에서 서남동은 민중이 아닌 것과 비교를 통해 그 실체에 접근하려 한다. 예컨대 민중과 백성, 민중과 시민, 민중과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대중, 민중과 지식인, 그리고 성서 속의 민중을 말함으로써, 사회적.문화적 실체로서의 민중을 규명하려고 한다.
김용복 역시 굳이 민중의 개념화를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념화 자체를 중요시하기보다는 민중에 대한 경험적 접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신학의 측면에서는 민중은 사회경제적 계급적 결정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고 지배.피지배의 정치적 관게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지배.피지배의 관계에서는 피지배자가 지배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길이 열릴 수도 있고 완전히 배제될 수도 있다. 즉 지배.피지배 관계는 유동적인 관계개념이기 때문에 어떤 역사적 원칙이나 과학적 논리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따라서 민중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이다."7)
"누구는 민중이 아니고 누구는 민중이다라는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나누면 그가 민중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이 질문은 누구는 선택받은 자요, 누구는 선택받은 자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객관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야기에 따라 민중이 결정되지 민중이라는 개념이 민중의 실체를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 대개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민중이라 할 수 있다."8)
민중 개념화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 이어 구체적으로 그 나름대로 민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특성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그 윤곽을 그려볼 것 같으면, 우리는 1세대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은 대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소외된 자'로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된 '소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고, 따라서 구체적 사회의 구조와는 별개로 설명될 수 있는 무한정한 일반화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김진호는), 결국 '소외론적 민중' 개념은 실천이론으로 발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3. 계급론적 민중론
그래서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구성체라는 총체적 사회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론적 민중 개념화를 시도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한에서의 계급동맹을 민중으로 본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강원돈의 민중이 해는 그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한국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몇 가지 특성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이와 같은 주요모순의 성격은 한국 민중의 구성을 광범위하게 만든다. 민족자주화를 통해 삶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계층과 계급들이 이러한 주요모순의 해결을 위한 잠재적 역량을 가진 세력, 곧 동맹체로서의 민중에 속한다....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은 노동자.농민 등 기층생산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화세력의 광범위한 연합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9)
이와 같은 민중 정의는 80년대 변혁적 민중운동의 상황에서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데 효과적인 민중이해를 도모하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결의 전선에서 아(我)와 타(他)를 분명히 구별해 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민중에 대한 접근이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김진호에 의하면, 이러한 시도는 구조환원론 내지는 계급 환원론에 빠짐으로써, 계급 범주와는 일정하게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는 민중의 개념화를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한다. 부언하자면, 김진호는 이와 같은 민중론이, 첫째 민중이 계급동맹이라는 계급론적 관점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고, 둘째 모순론에 근거한 계급논의는 계급구성 논의로는 적합하지만 계급형성 문제는 설명하지 못하며, 셋째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을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전제를 하게 되는 문제를 지닌다고 본다. 따라서 이와 같은 모순론적 민중개념화는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정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론 수준 이상의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10)
4. 형성적 실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이해
앞서 말한 두 가지 민중 이해에 대한 대안으로 김진호는, "사회구성체의 모순 구조 속에서 '이 모순적 구조를 극복하려는 역동적 형성적 실체'"로서의 민중개념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사회구성체는 민중의 모집단의 범위를 설정해 주는 역할을 할 뿐, 그 안에 있는 모집단이 자명하게 정치연합으로서의 민중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사회구성체 내의 모순들에 기초한 사회적 적대들이 단순히 경제논리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articulation)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민중은 모집단간의 헤게모니적 절합 유형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민중을 단순히 계급동맹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민중형성의 한 형태일 뿐 - 역동적인 '절합'의 유형에 따라 변화무쌍한 형태를 띨 수 있는 '형성적 실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꼭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이정희의 민중논의에서도 유사한 취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정희는, 민중을 역사/사회적 실체/집단이지만 우리가 민중을 '민중'으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은 운동/사건을 통해/속에서라고 말한다.11)
나는 민중 개념을 둘러싼 일련의 이와 같은 경향이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실체로서의 민중을 포착해내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90년대 민중운동의 지형 속에서 갖는 시의성과 정당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고정된 집단적 실체, 특히 계급으로서만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민중의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현실을 보다 실감나게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5. 역사 주체로서 민중과 변혁 주체로서의 민중
이상과 같은 시도가 민중 개념을 둘러싼 논의를 진일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이러한 논의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일종의 전제를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민중을 민중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민중은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기는 하나, 필수적인 요소인 중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최장집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중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노동 분업 내에서 피지배적인 지위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사회집단이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대립적 위치에서의 노동자 집단을 중심으로 농민과 하층 서민 계층까지를 결합하는데, 이는 주로 경제적 수준에서의 민중을 뜻한다"12)
앞에서 말한 민중 논의의 진전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시피 경제적 수준에서만 민중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경제적 수준에서의 규정을 배제한 민중 논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민중을 정의하는 데 있어 경제적 수준에서의 계급관계의 조명을 통한 접근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입장은 서남동이 말했던, '자본제 사회'에서의 '민중이라고 하는 실체의 주요부분'은 '노동자'라고 하는 견해13)를 이어받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나는 민중이 크게 두가지 범주에서 규정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과 '변혁 주체로서의 민중'으로 나누어 본다. 이 두 범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방식인가 하는 점은 좀 더 숙고를 요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단 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해 볼 때 민중 개념에 관한 논의의 혼선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말은 "민중이 실제로 인간의 모든 삶의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실제적인 주역"14)이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생산관계와 노동 분업 내에서의 지위에 따른 실질적인 역할을 포함하여, 역사 안에서의 제반 삶의 관계에서 민중이 주역으로 역할한다/하리라는 점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규정인 셈이다.
반면에 '변혁 주체로서의 민중'은 기존의 생산관계를 타파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출해내는, 특정한 국면의 주로 정치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생산관계의 급격한 재편, 곧 '혁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종국에 어떠한 형태로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반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은 기본적이면서도 포괄적 규정이라면, '변혁 주체로서 민중'은 특정 국면 또는 특정 형태의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규정인 셈이다.
민중을 이와 같이 범주적으로 구분해 보는 까닭은, 앞에서 말한 최근의 논의가 후자의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정한 국면에서의 민중의 동태를 잘 드러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적 층위에서의 민중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하는 일종의 정치주의에 빠질 수 있다. "운동을 통해/속에서 민중을 파악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경제적.정치적 제반 영역에서의 민중의 역할에 주목할 때 파악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5)
6. 민중에 대한 신학적 성찰 - 민중 메시아론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 주제는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다룰 때 필수적으로 다뤄야 할 또 하나의 주제이다. 이 강의에서 우리는 그 단초가 되는 내용들을 살피고, 그것이 어떠한 신학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확인함으로 이 논의를 마무리하려 한다.
서남동은 민중 메시아론의 단초를 김지하의 이야기에서부터 끌어 내온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성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땅을 정복하고 그 속에서 충만해져 세계를 변혁시키며 사회를 이루어서 역사를 추진해 온 보편적인 인간의 육체적인 주체, 곧 정신에 대응하는 인간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 민중이다. 즉 자기 스스로 노동에 의해서 밥을 먹고 노동에 의해서 집을 짓고 땅을 가꾸고 그래서 생산을 하고 또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말로써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나가서 자기 육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 조국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그런 구체적인 주체가 민중이다. 이것은 대체로 권력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또한 인텔리 등 중간입장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권력이라는 것은 결국 민중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이것이 나온지가 오래 되어서 그 자체가 제도화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고향인 민중을 억압하는 질곡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면 역사의 과정은 다시금 민중이 자기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려서 공의(公義)를 회복하도록 하는 파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권력이 정의를 반역하고 반민중적이 될 때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이고 권력에 편에 서는 것은 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지하)
"기독교의 복음이 (예수가) 죄인, 곧 밑바닥 천민을 구원하러 왔다 했으면 오늘날에도 역시 교회가 종을 울리고 있는 한 천민들 가운데서 복음의 폭발적인 생활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대상이 되는 가장 비참한 천민 자신이 그 구원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선봉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민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저항하고 승리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극단적인 비참을 선택적으로 구원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신비를 제시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 갈구하고 매일 기도에서 부르짖고 있는 메시아는 우리들과 같은 때묻은 자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한테 학대받고 굶주린 그들(흉악한 죄수들)로부터 온다는 이상한 확신을 나는 나의 경험에서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밑바닥으로부터 오는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작품으로 형상하려고 한 것이다."(김지하)16)
서남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상의 지하의 말에서 나는 민중의 실체와 그 역사적인 운명과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이 아주 휼륭하게 설파되었다고 생각한다. 민중은 태초부터 하느님과의 계약상대자이며(지배자가 계약상대자가 아니라), 그렇기에 땅을 정복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17)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억압되어 천민.죄인으로 전락했다. 이제 민중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느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구원은 (성서적인) 하느님이 역사를 통해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역사(役事)하시는 민중구원이라 한다. 여기에서 정의를 배반한 권력의 소외를 극복하는 하느님의 공의의 회복에 관해서 그가 비록 창세기의 태초와 고향을 언급했다 할 지라도 그것은 회고주의적.낭만주의적 방향에서가 아니라 예기적.종말론적 방향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의 처음과 고향은 과거(기억-관념)에 있지 않고, 미래(예기-행동)에 있다는 말이다.18)"19)
김지하의 이야기에 대한 이러한 서남동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로 다시 피력된다.
"우리가 민중에게서 메시아역을 보고 있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듯 어떤 정치적인 권세(權勢)를 가지고 군림하는 주권자와 같은 전통적 이미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회퍼에서 싹텄듯이, 에수의 고남과 그 경험을 통해서 새 인간성이 동틀 가능성을 약속받았다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픔의 경험을 통해서 눈이 밝아지고, 거기에 응답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은 '새 인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민중이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민중이 겪고 있는 고난 자체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면 그게 사람이 되는 길이고, 그게 바로 구원의 길인 것이죠. 이렇게 이해한다면 고난받는 민중이 메시아이고, 그래서 민중은 새 시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20)
그리고 서남동은 민중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민중사관을 그대로 두지 않고 그것을 신학적인 구원사관으로까지 신학화하는 것은 신학의 작업이고 또 민중신학이 신학을 민중에게 결부한 것은 민중이 단순한 연 대상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아 민중은 창조주인 하느님의 계약대상이고, 예수의 온 관심이 바로 이 민중의 해방에 있었기 때문에 민중은 신학의 일부가 아니라 신학의 전부이며 따라서 민중을 망각하는 한 그것은 신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데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21)
다음으로,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의 근거는 우리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이를 집약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다음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예수사건, 메시야사건은 기독교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성서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정치학하는 사람, 경제학하는 사람과는 달리 어떤 사건을 성서에 근거해 보는 것뿐입니다.
나는 민중의 사건을 거대한 하나의 火山脈에 비유하지요. 하나의 화산맥이 여러 시대를 두고 흘러오면서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분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 화산맥이 예수시대에 거대한 활화산으로 터진 것이 바로 에수사건이다 이렇게 보고 있고, 그 화산맥이 지금 이 시대에도 면면히 역사의 지각 밑을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들도 단절된 독립적 사건들이 아니라, 2천년전의 예수사건과 맥을 같이하는 사건들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것이 중요한 건데, 내가 추구하는 것은 現存의 그리스도, 즉 그가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어요. 그가 오늘 여기에 민중의 사건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2천년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가 - 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 -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기존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기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쫓겨난 '성문 밖' - 예수는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처형당해 죽었지요 -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22)
이상의 민중메시아론의 착상은, 우리가 제2강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건' 혹은 '실천'을 중심개념으로 하는 실천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틀 안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다. 민중 메시아론을 논하면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최소한 민중신학에서의 민중 메시아론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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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이 민중의 자리로 그 시각을 옮긴 것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제1강과 제2강에서 다루었기에 이번 강의에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2. 너무 앞선 걱정일지 모르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려 한다. 민중론을 다루는 것이 민중신학이 자기의 선 자리를 점검한다는 점에서, 민중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그 차이 만큼이나 다양한 민중신학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비판적 대화를 위해서는 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차피 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은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각각의 민중론과 그에 따른 신학적 성찰의 상관관계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잘못된 민중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떤 신학이 아무리 민중신학임을 자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신학을 민중신학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현재 민중신학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민중론들의 차이가, 그 차이점에 입각한 민중신학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민중신학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해야 할 만큼 심각한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태도를 요한다. 차이점은 분명히 규명하되, 그 차이와 달리 공통점 또한 분명하다면 우선 그 공통점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때도 있다. 실제 사물의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이론에서도 어떤 한 분야의 논의가 다른 분야의 논의와 기계적 정합성을 갖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김진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 - 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집(1993.봄), 21-47. 흔히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말할 때, 제1세대의 민중신학자에서의 민중론을 주요대상으로 함으로써 민중신학에서 민중론은 정의되지 않은 모호한 것으로만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김진호의 이 글은, 제1세대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격을 규명할 뿐 아니라 제2세대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검토하고 나름의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의 민중 논의를 한 단계 끌어 올린 작업이라 평가할 수 있다.
4. 민중에 대한 개념화를 거부한 입장의 합리적 핵심은 존중되어야 한다. 수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념화를 거부하며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민중을 강조한 것은 민중의 존재/활동 양식의 중요한 한 특성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개념화는 꼭 필요한 일이다. 어떠한 논리이든, 그 논리를 세우는 데 개념화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념화는 논리를 세우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개념화한다고 해서 곧바로 현실의 실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중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실체'라면 개념화의 여부와는 상관 없이 민중은 그 특성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화는, 그것이 올바르게 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문제삼아야지, 그 개념화가 곧 바로 살아 있는 실체를 박제화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문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민중 개념화를 거부한 것은 민중의 자리로 '존재이전' 해야만이 진정으로 민중사건에 동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세에 진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5. 안병무,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민중신학 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27. 여기서 안병무는 민중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자기초월'의 능력을 지적함으로써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또 다시 검토해야 할 하나의 주제가 될 것이다.
6. 서남동,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24이하. 또한 같은 책에 수록된, <민중(씨알)은 누구인가>, 206-220 참조.
7. 김용복,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한국민중의 사회전기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운동>>, 서울: 한길사, 1987, 25.
8. 김용복, 앞의 글, 26.
9. 강원돈,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기독교의 실천전략>, <<물의 신학>>, 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467.
10. 이와 같은 비판에 우리는 진지하게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첫번째 비판과 관련하여, 계급론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 민중론이 어째서 '민중'론으로 대두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계급'론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가를 밝혀 주는 역사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다.
11. 이정희, <민중의 언어 없이 민중의 시대는 오지 아니한다>, <<신학사상>> 81집(1993.여름), 110.
12. 최장집, <민중 민주주의의 조건과 방향>, <<사회비평>> 6(1991.12), 335-336.
13. 서남동, <민중(씨알)은 누구인가>,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09.
14. 서남동, 앞의 책, 209.
15. 예컨대 민중은, 그 집단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개별적으로)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의식화되어 있어야만이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은 때때로 철저하게 자기이해 관계에 매여 즉물적(卽物的)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늘상 대하는 민중은 이러한 모습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즉물적 반응마저도 그들의 존재적 특성(그들이 한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변혁의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6. 서남동, <두이야기의 합류>, 앞의 책, 45-46에서 재인용.
17. 나는 뜻밖에도 미로슬라브 볼프의 노동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은 통찰을 자극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Miroslav Volf, Zukunft der Arbeit - Arbeit der Zukunft: Der Arbeitsbegriff bei Karl Marx und seine theologische Wertung, Kaiser Verlag, Muenchen, 1988 / Matthias-Gruenewald-Verlag, Mainz, 1988. 이정배 옮김, <<노동의 미래 - 미래의 노동: 칼 맑스의 노동에 대한 신학적 평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특히 제1장 참조.
18. 민중신학의 민중 메시아론의 근거가 되는 이와 같은 견해는, 내가 보기에,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을 밝힌 김진호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명징성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지향은 영원회귀적이면서(과거적 시공간의 지평) 미래전망적 차원(미래적 시공간의 지평)을 갖는 이상적 담론 지평인 '하느님나라'를 현재성 속에 투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라는 신앙적 언표는 그때마다의(동시대적인) 시공간에 권력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화용론적) 진리체계다."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예수 르네상스 - 역사의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 263.
19. 서남동, 앞의 글, 앞의 책, 46-47.
20. 서남동, <민중신학을 말한다>, 앞의 책, 180-181. 1980년에 발표된 이 주장은, 실천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언뜻 보면, 1년전에 발표한 앞의 글에서의 주장, 곧 김지하의 이야기를 해석한 것보다 오히려 후퇴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앞의 글에서는 민중의 능동적 적극적 역할, 곧 주체로서의 민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주장에서는 고난의 담지자로서 민중의 메시아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대할 때 우리는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어법의 특성을 잘 헤아리며 그 동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볼 것 같으면, 분명히 개념정의가 불분명하고 그래서 논리적으로 미흡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징후적 독해'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 동기에서의 논리적 일관성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내친 김에 최근의 김창락의 <기로에 선 민중신학>(<<신학사상>> 96[1997.봄)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 글은 그와 같은 점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이 보인다. 민중신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이 글에서, 김창락은 민중신학의 해석사나 발전사는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특정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작업만을 민중신학의 전체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그들의 표면적 언술 그대로를 문제시하여 민중신학의 논리를 재구성하고 거기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글에서 김창락은 '문자물신주의'에 빠짐으로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글을 보면서 "학술논문은 '무균질 우유'인가?"하는 엉뚱한 화두를 떠올렸으며, 이 점에서 그 글은 또한 "무균질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의견을 보다 분명히 피력하기로 하자.
21. 서남동, 앞의 글, 앞의 책, 199.
22. 안병무,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앞의 책, 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