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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죽었다"의 뜻 | 니체 | 3분 정치철학
      "신은 죽었다"의 뜻 | 니체 | 3분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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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시간인데 정말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하셨네요 대단하세요 현재의 무신론 학자들도 니체의 말은 잘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니체는 현대인들의 도덕관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VtZ1GFQjz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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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사람들도 알아야 할게 있는데 비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서로에게 제대로 된 얘기를 하려면 당장 선입견과 혐오부터 없애야함 특히나 혐오는 요즘 사회에 가장 큰 악인데 혐오를 너무 당연히 여기게 되고 혐오를 너무 잘 표출하게 됨 ↓https://www.youtube.com/watch?v=asGKOTRTobE&pp=ygUQ6riw64-F6rWQIOygleumrA==

    • 종교별 사후세계 (full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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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을 망친 친일파 기독교인

      • 익명e134e
      • 2025.01.05 - 13:41
    한국을 망친 친일파 기독교인 (1)

    박희도

    약 력 (박 희 도)


    1879 - 황해도 해주 출생
    1914 -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중퇴
    1915∼1918 - 감리교회 전도사, 중앙유치원 설립 운영
    협성보통학교 부교장
    1918 -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
    1919 -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 33인 중의 최연소 서명자, 이 사건으로 2년간 징역
    1922 - 좌파 성향 잡지 [신생활] 창간, 사장으로 취임, 이 활동으로 검거되어 다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말에 출
    1926 -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계획에 참여, 이 시점에서 그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경도됨
    1927 - 신간회 총회 간사
    1929 -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보편집위원
    1939 -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 창간, 사장으로 취임
    1940 -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 -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9 - 국회 반민특위에 체포
    1951 - 사망


    최연소의 3·1 민족대표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의 의창학교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감리교계 협성신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191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으나 중퇴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된 중앙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고, 베커(A. L. bechker) 선교사의 신임을 얻어 협성보통학교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18년 9월부터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를 맡게 되어 청년 학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학생층과 감리교계가 3·1 운동에 참여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위치와 활동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로 자신이 포섭한 동료 전도사 김창준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 신문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언서를 배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선은 예전에는 독립국이었는데, 강제로 일본에 '병합'을 당하여 우리는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병합' 당시 일본인과 같이 자유와 교육과 생활을 동등히 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것이 많으므로 어쨌든지 독립국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예심 판사의 신문에서도 "피고는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할 줄로 생각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하고,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그렇다"라고 확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른 이들보다 형량이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립한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맡고, 좌파 청년 김명식·신일용·유진희 등을 편집진으로 1922년 {신생활} 잡지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하여 비타협적·급진적 언론항쟁을 벌였다. 이 신생활사의 취지서의 서두에서 "인간사회는 사장(沙場)인가 화원(花園)인가. 정치, 법률, 도덕, 종교가 유(有)하나, 대중에게는 자유와 평등이 무(無)하도다"라고 전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오직 개조와 혁신이라 하는 인류의 공통한 표어의 세계 대세에 순응코자 함이로다. 조선인이여 인습의 길길(拮拮)에서, 위력의 압박에서, 경제의 노예에서 이탈하고 신생활의 신운동을 개척할 지어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22. 1. 19.). 그리고 창간호에서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이라는 '신생활 주지(主旨)'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일제 경찰이 좋게 보았을 리 없다.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수차 검열과 삭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922년 11월에 발간한 제13호 기사를 트집잡아 박희도를 비롯한 편집진들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총독부 경무국은 1923년도 보고서에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소요 전과자 박희도를 사장으로 하는 잡지 {신생활} (경성)은 대정 11년(1922) 11월호의 동지상에 '러시아 혁명 5주년 기념호'라는 제하에 가장 열악하고 천박한 언론으로 치열한 공산주의를 구가하고 현재 사회의 조직을 저주하고 계급투쟁을 고취하고 사회혁명을 종용 선동하며 유치한 사상계를 교란하고자하므로 바로 행정 처분에 의하여 차압하고 다시 언론계의 확청(廓淸)을 기하기 위하여 다음 12년(1923) 1월 8일 그 발행을 금지하고 한편 책임자를 사법처분에 부치게 되었다.({현대사자료} 1929, 5, 9면)

    박희도는 다시 이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말경에 출옥하였다.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박희도는 1926년 10월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 부활계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절대독립론을 포기하고 자치론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2월에 창립된 신간회에서 총회 간사를 맡고, 1929년 8월에는 안재홍, 주요한* 등과 함께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 회보편집위원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신간회가 해체된 후에는 신우회를 거점으로 최린* 등의 자치론자와 접촉을 가졌다. 그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점차 버리면서 일제와 타협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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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향자의 친일지 {동양지광}의 사장으로


    박희도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친일파로 전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제측의 회유 공작에 의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부일활동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1939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다른 잡지와 언론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잡지가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선양'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양해와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의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 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동양지광} 창간호, 1939)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쓴 [피로써 역사를 철한다]라는 글과 그 밖에 많은 친일논설들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 잡지의 창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2월 8∼9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을 빌어 이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윤치호*, 최린, 장덕수* 등을 연사로 초청하여 시국문제 대강연회와 영화의 밤을 개최하였다. 1939년 말경 {녹기(綠旗)}의 편집자였던 모리타(森田芳夫)는 [조선 사상 제 진영의 전망]이라는 기고문에서 {동양지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양지광사가 태어난 것은 금년 1월이다. 지금까지 조선인측의 언론은 거의 조선어였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지광}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내선일체'의 주장 하에 태어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 박희도씨는 신념과 배포있는 사람이요, 정치적 수완도 좋다. 많은 경제적 희생을 하면서도 매호 계속해서 내고 있다. 대체로 내선일체에 관하여 내선인 쌍방의 주장을 게재하고 있다. 그 해 8월부터는 협동예술좌라는 신극 극단을 동양지광사에 전속시켜 친일적 내용의 연극을 서울은 물론 함북, 간도, 상해 등지까지 순회공연하게 하였다. 그런데 박희도가 이처럼 열성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는데도, 총독부는 한때 '이 잡지가 종이 소비에 비하여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발간 중단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박희도의 간청으로 총독부에서 '인쇄용지 배급권'을 다시 주어 1941년 12월부터 다시 속간하게 하였다. 박희도는 이 속간호에 [총후 국민의 급선무]라는 친일논설을 게재하고, 같은 달 20일에는 반도호텔에 신흥우, 정춘수*, 전필순*, 정인과*, 양주삼*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장장 7시간에 걸쳐 이른바 '미·영타도좌담회'를 개최하여 그 사회를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 내용을 이듬해 2월호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속간 무렵부터 이 잡지가 친일 논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박희도는 징병제 실시 발표에 대하여 1942년 5월 13일자로 미나미(南) 총독과 이다가키(板垣) 조선군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장을 보내고 이를 이 잡지에 게재하기까지 하였다.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라는 글을 통해서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 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 하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윤치영은 그의 회고록에서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의 명의의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하루는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그 당시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 특집을 냈는데 다른 지명 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을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는 내 이름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이모, 신모 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들의 승락없이 게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윤치영의 20세기}, 189면)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해방 직전에는 일제의 패망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윤치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일제 말엽 대화숙에서 서슬이 시퍼런 감시를 받아 가며 일본 패망의 날을 기다리던 우리들을 가끔 찾아 준 박희도 {동양지광}(東洋之光) 사장은 총독부 경무부에서 들은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일본군의 동향을 귀뜸해 주면서 자기는 기왕에 총독부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몸이 되었지만 후일 세상이 바뀌는 날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일이 다시 기억난다.({윤치영의 20세기}, 457면)

    여기서도 그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일제의 패배가 확실해 가자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만 자기의 '속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의 '속 마음'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한들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일행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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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치 못할 민족반역자로 낙인'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가 어려웠으리라.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에 나온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 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 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 ……일제에 가장 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요,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에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186∼187면)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년 9월에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이 승리할 시는 조선 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한국전쟁중인 1951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新生活}, 1922.
    {東洋之光}, 1939∼44.
    {민족정기의 심판}. 1949.
    {친일파군상}, 1948.
    윤치영, {尹致暎의 20世紀}, 1991.


    한국을 망친 친일파 기독교인 (2)

    정춘수

    약력 (정 춘 수)


    1875 - 충청북도 청원 출생
    1919 - 3.1 운동 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서명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징역1922 -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전임
    1927 - 신간회 본부 간사
    1934 -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 감리교 총리원 이사
    1938 - 경성기독교연합회 부회장 선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 후 전향성명서 발표
    1939 - 일선감리교 특별위원회 위원,
    조선감리교 제 4 대 감독으로 피선
    1941 -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1949 - 국회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
    천주교 개종
    1951 - 사망


    초기 독립운동 경력



    정춘수도 처음부터 친일파나 부일협력자는 아니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 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원산 남촌동교회(감리교) 목사로 시무하던 중, 박희도, 오화영 등의 권유로 3.1 운동에 참여
    이 사건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변 절

    정춘수가 부일협력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 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된 후 수난을 당하면서 부터이다.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기독교계 친일협력 조직인 경성기독교연합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해 9월 3일, 연류자들과 함께 '전향 성명서'를 발표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난 후 친일활동에 가담


    참가한 친일 단체

    경성기독교 연합회 부위원장 (1938년 5월 8일)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 (1939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초)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0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1944년 말)


    친일 행각

    정춘수의 친일 행각은 1939년 9월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시국대응 신도대회 (1941년 3월)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 (1941년 10월 10일)
    교역자와 신도 대표 50여명을 이끌고 근로봉사
    '종교보국 5개항' 결의 (1941년 10월 21일)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토록 결의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 공문 (1942년 2월 13일)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
    '애국기 헌납 및 교회병합실시에 관한 건' 공문 (1944년 3월)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나머지를 팔아 전투기를 헌납하자는 결의
    황도문화관, 미소기하라이 및 신사참배 (1944년 9월)
    일본 정신과 문화를 주입, 일제 신도의 재계의식인 미소기하라이를 행함, 남산 조선신궁에서 신사참배


    친일의 말과 글

    [전향성명서] (1938년 9월 3일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자 전원의 명의로 발표)
    "참다운 황국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응징의 이유 세 개] (동양지광 1942년 1월호 좌담회)
    "우리 적성국가 미, 영에 대해서 철저적으로 응징을..."
    [결의안과 혁신안] (1940년 10월 정춘수가 주재한 총리원 이사회에서)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
    [황군위문 및 철물 헌납 건] (1942년 2월 13일 정춘수 통리 명의 공문)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


    천주교로 개종한 후의 변명

    광복 후, 안팎의 비판에 접하게 된 정춘수는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자, 천주교로 개종한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다.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을 망친 친일파 기독교인 (3)

    정인과

    약력 (정 인 과)
     
    1888 - 평남 순천 출생
    1911 - 평양 숭실 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 졸업
    1913 -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유학
    1919 - 미국 산엔셀모 신학교 졸업
    1919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활동,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
    임시정부 외무차장 역임
    1920 - 10월 외무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미국으로 돌아감)
    1921 - 프린스턴대학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
    1923 - 프린스턴대학 정치사회학과에서 문학사 취득
    1924 -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 공부 중 11월 말경 귀국
    1925 -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
    1930 - 1월 2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 무혐의 처분
    1937 - 6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
    1939 - 장로교 총회 중앙상치위원회의 총간사로 취임
    1941 -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1942 -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1949 -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
    1972 - 사망


    초기 독립운동 경력과 변절 (정 인 과)
     


    3.1 운동 당시

    정인과는 3.1운동 당시에는 미국에 유학 중에 있었고,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하기 위한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대표 안창호를 수행하여 중국의 상하이로 간다.


    임시정부에서의 활동(1919∼1920)

    임시정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 및 외무차장으로 활동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감


    국내활동(1924∼)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1924년 귀국하여 국내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으면서 활발한 국내 활동을 전개(1925년)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 받던 중, 1930년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의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고 풀려남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


    변 절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흥사단과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에,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협력하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남
    그 후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가담


    주요 친일 활동 (정 인 과)
     
    참가한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총간사(1939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1942년)


    친일 행각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부일 협력
    [장로회 지도요강] -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 (1940년11월10일 매일신보)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 (매일신보 기고문 1941.9.3∼9.5)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친일잡지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
    친일잡지 {조광} 1942년 2월호에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
    기독교계의 부일협력 기관지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일경에 의해 지명됨
    {기독교신문}의 창간사 -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鄭仁果, 창씨명 德川仁果, 1888∼1972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결성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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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에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장로회 총회는 이듬해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면)

    이는 장로교가 다른 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여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러한 장로교 부일협력의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정인과 목사였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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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대표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정인과의 본적지는 경성으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 태생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8월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견하고 정인과, 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월 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6월 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동양 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년 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그의 사임은 1921년 3월 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11월말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다. 그 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경(중국어로)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 씨 환영.……1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에 힘쓰던 정인과(鄭仁果) 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에서 신학(神學)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저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이겨 할 수 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 동안 있게 되었는 바,……정인과 씨는 5년 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년 1월 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가 그 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는 그를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 한 뒤,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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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 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교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는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년 11월 성명과 함께 [장로회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
    ({매일신보}, 1940. 11. 10)

    이어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어용 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특히 정인과가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 도쿠가와(德川仁果)라는 창씨명으로 각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월 24일부로 공문을 발하였던 바, 5월 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全)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에 귀노회연맹의 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기독교신문}, 1942. 5. 20)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회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한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해 마지 아니한다."

    즉,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미·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조광} 1942년 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정인과를 매우 신뢰했으며 또한 비호했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문제로 60일 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 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 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 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사이가(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 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목회여운}, 97면)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 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년 4월 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월 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시킨 후 1942년 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佐野吾作)는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발행 목적과 강령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고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의(趣意)하에 본보는

    ·반도 기독교 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각교파 간 돈목(敦睦)의 기도(企圖)와 각파 간의 연계 합동의 추진
    ·건전한 신앙의 발달과 교화기능의 증진
    ·종교의 국민정신작흥과 국민사상 계도
    ·상의하달(上意下達)과 하정상통(下情相通)의 원활
    ·필승체제 확립에 관한 계도(啓導)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국민 개로(皆勞)
    ·부인 계발
    ·교내 여론의 통일 지도

    등 강령을 실행하려 한다."

    이 신문은 그 첫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년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죄상기}(1949)는 ['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22일 특위는 8·15 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 '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 총진회장이 되어 신도배(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 '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인용자)를 한 번 해 보지' 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론}, 1939∼1942.
    {매일신보}, 1940.
    {기독교신문}, 1942∼1944.
    {반민자 죄상기}, 1949.
    전필순, {목회여운},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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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추악한 친일행각

    조선 멸망은 관료부패 때문이었다

    “경술년 7월(음력) 대한(大韓)이 망한 뒤 작위를 받은 조정의 관리가 모두 72명이었다. 작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조정구(趙鼎九) 한 사람뿐 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음란한 계집이 재산을 탐하고 색을 좋아하듯이 기뻐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하늘이 이런 놈들을 왜 싫어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여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이러한 정책에 협력하여 야훼를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량주의, 타협주의, 어용기회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되자 3.1운동의 정신이 사라지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사참배를 권유할 때 아무런 저항도 없이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하게 되어 기독교의 정신을 병들게 하였으며 이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기독교는 반성과 새로운 각성운동으로 재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각성없이 오늘에 이르게 되어 기독교정신은 현실도피주의 기복주의 어용주의로 전락하여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시종원 부경(요즘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이었던 정환덕(鄭煥德)의 회고록 ‘남가몽(南柯夢)’에 실린 이 말은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객원교수가 ‘매천야록’, ‘기려수필’등과 함께 구한말 비사(秘史)로 유명한 ‘남가몽’을 중심으로 당시 역사의 이면에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해설한‘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규장각)라는 책을 펴냈다. 광운대 강사인 박은경씨도 대한제국의 관료들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고스란히 연결된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낸‘일제하 조선인 관료연구’(학민사)를 최근 출간했다. 박씨는 이 책에서 “1909년 6월 당시 ‘한국직원록’에 수록된 조선인 관료 3천 6백 24명 중 67.6%인 2천 4백 49명이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재임용됐다”고 주장했다.

    ★ 일본이 패전하여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감옥에 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승리의 감격으로 교회에 왔을 때 교회에서는 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거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환영은 커녕 회개하는 기색도 없이 자기 안일만을 위하여 강단과 교권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출옥파와 어용파로 분열이 되었다. 많은 성도들은 교역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한말 조선왕조의 관료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이 두 책은 지난 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도 결국 관료들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에레미아 13:10)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미의 사진을 걸었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박성수교수의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는 대한민국 50년사가 조선왕조 5백 년사의 축소판이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있다. 미·일·러·중 등 강대국이 각축하는 국제 환경과 함께 국내정세도 1910년 무렵과 1997년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은 20세기에 우리처럼 두 번 망한 나라, 두 번 실수한 국민은 지나간 역사를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인식에 따라 쓰여졌다. 따라서 이 책은 구한말 역사의 이면을 기록한 ‘남가몽’에 대한 해설, 부정부패와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 대해 왕조실록을 중심으로한 비평과 설명 등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 기독교는 해방이 되어 신앙과 정의에 사는 분이 심히도 적어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그로인해 신앙과 정의가 혼돈의 세상이 되었다.
    어용 그들이 교권을 잡고 있어 정치제도를 개선할 수 없어 교회나 지방회(노회) 총회는 수라장이되어 고등종교가 하등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하 조선인 관료 연구’는 박은경씨가 자신의 94년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나라가 망하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지배엘리트들의 실상을 실증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다. 그의 연구 결과 대한제국 관료의 3분의 2가 일제시대 식민관료로 충원돼 식민정책의 대민집행관 기능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조선인 관료의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도지사나 도참여관의 경우,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대한제국 관료들이 주류를 이뤘고, 그외 대부분의 고등관직도 이들이 점유했다. 이는 일제가 갑오개혁을 계기로 친일적인 관료들을 치밀하게 육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대한제국 관료 출신으로 일제 식민관료가 된 2천 2백여 명과 조선총독부가 직접 충원한 5백여 명 조선인 관료의 이력이 실려있다.

    ★ 친일파 목사들은 죽음의 길로 가는 동족을 찬양하였으니 살인 협조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이 패전하여 해방되었을 때 회개와 반성은 고사하고 그들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처벌받기는 커녕 오히려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과연 이래서야 되겠는가?

    ★성명서
    합방 이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앙망하고 있었던가. 30여 년간 조선시정 중 최대의 획기적 업적이고 특히 남총독의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인 요소를 넣은 것이어서 실로 찬송할 말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이 되는 대도가 열린 것이다. 소집을 받은 청년제군! 제군은 폐하의 방폐가 되려는 어신임을 얻는 것이다. 울 수 있는 데까지 울어라, 울음을 그치거든 여하히 하여 감격에 답할까를 종용히 생각하라.
    기실 아등은 아직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폐하의 적자라하여 부끄러운 것이다.
    소화 17년(1942년) 5월 11일
    징병제 실행감사
    전경성기독교대회
    (기독신보 1942. 5. 18)

    ★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일본 국가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미국과 소련을 규탄할 수 있는가!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대로는 절대 안된다.

    ★ 친일파 그들은 반드시 처벌받아 강단과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기독교는 범 회개운동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회개운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는 친일파들 때문이며 그들은 반성은 커녕 변명으로 일관하여 분열과 분단을 초래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와 한국정신을 부패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용서해주고 잊어버리고 있다. 현재 기독교 목사들의 사고방식은 거의가 어용 사상이 지배적으로 어용목사가 훌륭한 목사요 국가를 사랑하는 목사로 인식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로 우리는 혼돈가운데 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비겁한 마음과 자기를 위한 어용기회주의 사상을 전염시켜 사회 어느 한 곳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마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암적존재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토록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해 주고 덮어 주고 변호하고 찬양하는 것이 기독교 사랑인 것처럼 기독교 사상을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과 정의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어용사상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땅에 도덕성 회복은 요원하다.

    ★ 이에 친일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출옥성도를 비양심적이라고 매도하면서 교묘히 자숙안을 삭제하고 피하였다. 그로 인해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자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한심할 지경이었다.

    ★ 특히 친일 반역자를 처치하지 못한 것과 분단을 가져온 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일로 천추만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후 통합측은 민족반역자 전필순을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하였고 성결교회는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일꾼될 위대한 종들을 교육시킬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단체가 되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지금도 기독교 목사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오직 자기 과시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이러고서야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겠는가. 기독교가 역사의식을 상실하게 되면 역사도 언젠가는 기독교를 상실하게 된다. 이유는 윤리를 떠난 기독교는 존재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아모스 5:21).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의 윤리의식도 성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리의식은 가면 갈수록 추락하여 기독교의 윤리가 없는지는 오래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마태 7:21) 일반 친목단체이다. 그들은 개인구원에 집착하여 오직 자기 환상에 도취되어 있다. 식민지시대와 이승만 장로의 독재시대 때 얼마나 많은 교역자들이 로마서 13장 1절을 악용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순종하라."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왜곡했던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으며 그런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어용으로 뒤덮인 우리 사회는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 아무리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이 많다 해도 능욕을 질 용기가 없는 어용사상을 가지고는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 박정희가 불법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장면 정부를 몰아냈는 데도 기독교 일부에서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커녕 환영하는 추세였다.

    ★ 더욱 기막힌 것은 전두환 집단의 죄를 지적하기는 커녕 찬양을 하고도 그들은 지금껏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인지 선한 일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교인들을 가르치겠는가?(에레미아 5:30-31) 그들이 가르친다고 교인들이 감화를 받겠는가? 그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허공에 외치고 있지 않은가?

    ★ 독일에서는 현재까지도 나치스 범법자들을 추적하고 있어 형사처벌에 시효가 없다. 나치스에 협력한 목사들도 가차없이 처단하여 교회와 공직에서 축출했으며 현상학의 거두 하이데거도 나치스에 협력하였다고 하여 일생을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다.

    ★ 우리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 반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어용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국가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방된지 42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어용 천국을 만들었다. 또한 이승만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박정희, 전두환을 지지하여 어용들을 애국자로 혼동하는 세상이 되어 대한민국은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급하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용을 처단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친일 반역 교역자들이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산정현교회 목사관에서 몰아 내고도 서울에서 버젓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장로교단, 양주삼 목사가 아직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감리교단 등 기독교는 어용의 온상으로 민족정기를 좀먹는 단체로 오늘의 현실문제를 낳았다. 기독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징병제를 찬양하고 신사참배를 권고하고 황국신민된 것을 감사하고 성경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이명직 목사가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학생을 가르쳤으니 그의 제자들의 사상이 어떠하겠는가! 그러기에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에서 출판한 성결교회 인물전을 보면 이들을 대대적으로 칭찬하기를 '사부요 교부'라고 하기까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으며 성결교가의 작사자가 이명직 목사인데도 누구 한 사람 말하는 목사들이 없다. 이러한 이명직 목사를 칭찬하면 출세하고 나쁘다고 하면 고립되는 교단 풍토가 되었다.

    어용 목사들은 독재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로서 독재자의 죄를 지적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할 용기가 없다면 목회나 할 일이지 범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범죄의 협조자가 되어 이땅을 범죄의 소굴이 되게 하고 있다. 어용을 몰아내지 않고는 교회의 화평이나 법의 회복, 질서 회복, 도덕성 회복을 절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와 도덕성이 마비된지 오래다.
    기독교 목사들은 독재자를 축복해 주고 부자를 우대하고 정직한 생활과 용기 있는 생활, 예수님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처벌로 인식되었고 시민 대중과 근로자의 고통을 믿음이 적은 결과로 돌려버리고 관심조차 없었다. 특히 조용기 목사와 일부 부흥강사라는 자들은 한국 기독교정신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진정 기독교가 지금과 같이 어용사상을 몰아내지 못하고 어용사상이 기독교 안에서 춤춘다면 기독교와 한국의 장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궁금하다. 그들은 출세를 위한 것이라면 사탄의 앞잡이도 주저하지 않는다(열왕기 상 22: 6, 20-23).
    어용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도 도덕성 회복도 절대 불가능하다.

    (http://acac.y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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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자가 발달장애를 치료할 능력이 있을까요? 이자의 말은 모두 허위와 가식이니 N
      12시간 전
    • 보내면 엄중조치한다고 하니까 안하는거지 정부가 비리비리하면 바로 보내는거지 N
      12시간 전
    • 저런 사람을 30%넘는 사람이 지지한다는게 미친나라지 N
      12시간 전
    • 개독 수준 알만하다
      06.21
    • 병신새끼들.... 딱봐도 지들이 실수한거지 뭘 그걸 또 거기에 북한, 중국.일본 오만가지 다 갖다붙이네 ㅋㅋ 교회새끼들이 하는게 뭔짓거린줄 아냐?? 지들이 뭔가 문제 생기면 외부에 책임을 돌린다는거야 마치 인터넷에서 쌍욕 씨부렸다가 나중에 경찰조사 들어가면 "제가 한게 아닌데요?? 우리집 고양이가 키보드친거같은...
      06.20
    •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갖다 붙인거야 개소리지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야 정신병자새끼들 에휴 자살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공공의 이익을 놓고 봤을때 윤리적 법적으로 국가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게 아니니 자살을 나쁜것 좋지 않은것으로 정의하고 법과 도덕 윤리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교육을 시킨거지 그리고 대다수...
      06.20
    • 굽신거리고 말 잘듣고 노예같은애들을 교회에서는 사회성.성격좋은애들이라고 함 ㅋㅋㅋ
      06.20
    • 소외감 느끼다가 안나오는 사람들이 없도록 인도하는게 셀모임장의 역량일지도
      06.20
    • 나도 첫댓처럼 사회성차이라고 생각. 리더나 다른분들이 의도적으로 그러지는 않는거같고.. 기본적으로 모임에 잘 나오고 얘기를 잘 나누는사람이 더 많이 발언하는거같아. 게다가 얘기도 잘 안하고 잘 모르는사람에게 많이 말하라고 하는거도 부담될수도 있잖아??
      06.20
    • 뭐 하나 해먹으려고 온애들인데?? 이제 알았냐?? 걔네들이 미쳤다고 주말에 짬내서 교회다니겠냐 여자랑 한번 자려고. 돈많은 남자 꼬셔서 인생 펴보려고 본인 사업 매출 올리는데 도움이 될까하는 애들 부지기수다 정신차려라....
      06.20
    • 우파짓 맞음
      06.20
    • 우파새끼들 나라 팔아먹는짓거리 너무 많이 함
      06.20
    • 신에게 기도하는 그런 미성숙한짓 하지말고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스스로 어떠한지 의존성 성격장애에 걸린 정신병자마냥 신 그만 찾고
      06.20
    • 만나보기라도 하는건 나쁘지않은데 주변사람들이 저렇게 부담주면 될 것도 안되는데...
      06.20
    • 만나보기라도 하는건 나쁘지않은데 주변사람들이 저렇게 부담주면 될 것도 안되는데...
      06.20
    • 내지마라 목사에게 삥뜯기는거다
      06.20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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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기독교
  • 사이비와 이단이 자신을 정통이라 외치고, 진짜 정통을 이단으로 찍고 마녀사냥을 벌인다.
    거기엔 가스라이팅과 세뇌, 그루밍과 권력이 썩은 피처럼 흐른다. 무력한 자들이 완장을 차고 썩은 질서를 신의 뜻이라 우긴다.
    믿음은 없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말을 외우고, 눈을 감고, 살아간다. 도대체 언제까지 소시오패스들의 먹잇감으로 살 셈인가!
    왜 그들은 목사의 혀끝에 정신을 맡겼는가? 왜 스스로를 부숴가며 복종을 택했는가? 아, 그대들은 이것을 아름다운 순종이라 부른다지.
    복종(순종)은 미덕이 아니다. 그대의 영혼을 씹어삼키는 자들에게 등을 돌려라.
    자유는 순례자가 아닌, 도망자에게 온다. 그대여, 당장 그곳에서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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