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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죄의 결과인가?
만약 99가지 고통이 있다면, 99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고통을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고통에 대한 문제를 살피려면 아주 다양한 측면을 살펴야 한다.
오늘은 그 중 극히 일부분의 측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고통은 죄의 결과지만,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관점이다.
우리 삶에서 맞이하는 대부분은 죄에 의한 고통일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창조질서에 내재된 고통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내재적 고통에 대해 알아보자.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이미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창3:16, 새번역]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이 있다. 바로 고통을 ‘크게 더할’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רָבָה, 라바다. 이것은 ‘많아지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원래 있던것에 대한 생산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바의 용례로는 번성하다, 뛰어나다, 풍성하다, 지나치다, 늘어가다, 여러 번, 계속 등이 있다.)
이를 통해서 창조 세계 안에는 인간의 타락에 의하지 않은 고통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으로 구약학자들은 해석한다.
일을하다보면 땀을 흘리고, 근성장이 일어나고, 배가 고파지면 밥을 맛있게 먹는 자연스러운 일들
이러한 일들은 어쩌면 창조 세계 안에 포함된 선한 목적을 가진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을 줄 수 있다.
1) 선의의 경쟁, 긍휼한 마음 등 고통에서 맺히는 선한 열매가 하나님의 기쁘신 계획 안에 있다는 확신
2) 오래된 지구설을 지지할 때, 인류의 범죄 이전의 고통(죽음)문제에 대한 해결
== 조금 더 생각해보기 ==
2번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우선 나는 오래된 지구론을 지지한다.
한 명의 공학도로서, 우주의 나이가 6,000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일반계시로서의 자연과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을 주셨다.
자연과 성경은 충돌하지 않고 조화된다. 그러나 자연을 탐구한 과학과 성경을 탐구한 신학간에는 충돌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두 해석중 하나, 혹은 둘 모두를 수정해야한다.
지금 시점에서는 과학적 해석이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그렇기에 신학자들은 신학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생겼다.
위에서 이야기한 창세기 3장의 ‘고통’보다도 더 먼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창2:17, 새번역]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창조세계 내에 내제되어있는 고통과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추가적 근거로, 3장 22절도 볼 수 있다.
[창3:22, 새번역]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생명 나무를 먹기 전까지는, 끝없이 살 수 있는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창조세계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면 범죄 이전의 죽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받을 사람은 받고, 입맛에 안맞으면 수용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것은 사랑으로
Reference lists : [DEATH BEFORE THE FALL], [God, Evolution, And Animal Suffering], [인간의 타락과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