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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페르시아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오늘은 페르시아 전쟁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고대 시대에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맞붙었던이 전쟁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교과 가정에서 혹은 00과 같은 영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들어봤을 텐데요 그런데이 전쟁이 구체적으로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 페르시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이 전쟁이 정말 서양에서 오랜 전해져 온 것처럼 자유와 노예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었지만 살펴볼 때는 항상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료의 문제인데요 지금이 전쟁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료는 헤로도토스가 남긴 기록입니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집필한 역사를 통해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이 책은 서양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고대 역사로서 우리가 쉽게 간구할 수 있는 점은 헤로도토스 역시 본인이 전쟁에서
본 것을 직접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쓰기 수십년 전에 일어난 전쟁이었고 그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이 이야기한 바을 종합해서 전쟁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이 자료 자체가 어느 정도는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쓰여 있다는 점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전쟁 발발 약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본토의 동쪽에 위치한 아나톨리아에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당시에 리디아는 크로이소스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약 560년 546 KN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크로이소스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서부해안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정착지를 점령하 는데도 성공했고 곧 이들에게 일종의 조공 혹은 세금을 납부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토의 서쪽을 안정화한 크로이소스는 곧 동쪽 즉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렸지만 크게 패하고 권력을 상실했습니다 크로이소스 패배한 것은 이후 그리스와 페르샤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크로이소스 패배하고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게 되면서 그리스인들과 직접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밀레투스 같이 빠른 눈치로 재빠르게 페리샤 편에선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아시아 리스인 정착지 그이 크로이소스 a 명령을 따라 전쟁에 나섰기 때문에 이들은 곧 보다 가혹한 조건으로 즉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내는 조건으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인 정착지은 이제 보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 위치하게 되면서 이전에 비해 정치적 위상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이식이 어땠을까요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두 도시 국가는 페르시아의 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도시 국가들에 불과했습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발산지 나중에 알려질 아테네 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일명 참주이 도시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아는 참주 비록 참주인 했어도 권력을 비교적 잘 사용하여 아테네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그의 아들 히피아스 히파르코스 그렇지 못했습니다 후자는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살인을 당했고 히피아스 아테의 귀족들이 스파르타 구대 동원한 끝에 기원전 51년 경 아테네에서 쫓겨났습니다 아테네 참주정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때 쫓겨난 히피아스 동쪽으로 일종의 망명을 떠난 후 페르시아에 의탁하게 되고 나중에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하는데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아테네 귀족들의 요청을 받고 아테네 내부 정치에 개입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 그리스 본토의 정세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이 상황은 히피아스 쫓겨난 이후에도 로 계속되었는데요 히피아스 쫓겨나자 자연스럽게 누가 새로 아테네의 권력을 잡을지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고 이때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던 클레이스테네스 아는 임무는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전과는 다르게 귀족만 아니라 일반 시민 행해도 권력을
나눴습니다 즉 클레이 스트레스는 경쟁자를 이기고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전까지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일반 시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동원했던 셈인데 그 결과 클레이스테네스 no 아테네 민주주의에 시작을 알린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귀족제 약화되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스파르타는 심지어 클레이 스탠스의 경쟁자들의 요청을 받고 아테네에 직접 개입하기지 했지만이 개입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 no 잠시 아테네를 벗어나 도망갔지만 곧 돌아왔고 오히려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개혁을 약속하면서 일반인들의 더 확고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스파르타는 두 차에나 더 무력을 동원해 개입했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쫓아낸 히피아스 자신들이 다시 복귀시키고까지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한편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거듭되는 개입을 막기 위해 기원전 507년는 직접 페르시아로 가서 동맹을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같은 편에 서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리기 얼마
전까지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맞서 페르시아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은이 전쟁이 이후 서구인들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한 자유와 노예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한편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이자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부가 위치한 사르데스 도착한 아테네의 대표단은 원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에 맞서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기 원했지만 페르시아는 당시까지만 해도 아테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는 동맹이 아니라 아테네의 공식적인 복종을 원했고 아테네의 대표단은 이것에 동의하기 아지 했는데이 역시 이후의 페르샤 전쟁이 단순한 자유와 노예제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 본토의 상황이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을 때 이오니아 즉 아나톨리아 서부의 그리스인 정착지를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이라 부르는 사건이 발발한 것인데요이 반란 역시 그리스인들 끼리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낙소스 섬에서 벌어진 정치적 갈등의 결과 일부 부유한
가문들이 쫓겨났고 이들은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 그라스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낙소스 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엿본 아리스타 그라스는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 허락을 받고 페르시아 군성 아지 빌려 섬을 군사적으로 포위했습니다 약 4개월 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포위를 스스로 풀어야 했습니다 군사적 실패를 맛본 아리스타 그라스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던 페르샤 부터도 신뢰를 잃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따르면 권력이 흔들리게 된 그는 위기를 답하기 위해 대담한 선택을 합니다 참주정으로 철폐하고 일견 민주주의로 보이는 체제를 도입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페르시아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겉보기에 체제를 개혁하고 외부의 적을 상정함으로써 자신이 계속 권력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처럼 이오니아 반란의 원인을 아리스타 그라스 개인으로부터 설명하려고 하지만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더 이상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안 그래도
군사적 실패 이후 권력이 약해진 아리스타 그라스의 말만을 따라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많은 역사학자들은 페르시아로 터 지원을 받은 그러니까 친 페르시아 진영에 속하는이 지역 참주 대한 기존 그리스인들의 반감이 반란에 큰 역할을 했다고 추정합니다 게다가 이전에도 리디아 그부 지배를 받았지만 페르시아의 지배를 더 악화된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여지도 있었는데요 이전에도 조공 혹은 세금을 바쳤지만 그 양이 더 많아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무엇보다도 페르시아의 여러 군사 원정을 위해 군대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이는 이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포기했던 상황입니다 어쨌든 기원전 499년 아리스타 그라스는 자신이 직접 그리스 본토로 가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외부의 갈등에 휘말릴 필요를 느끼지 못해 단박에 거절했고 아테네는 척의 선박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본격적인 반란은 총독부가 위치한 사르데스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이 공격 은 곧바로 실패하게 되는데요
포위가 시작되고 얼마 후 페르시아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오니아 인들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아트네 인들도 고향으로 도망갔고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밀레투스 군대를 파견했고 이때 역시 그리스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저항선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일부 정착지들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고 일부는 페르시아의 회유책에 넘어갔습니다 헤로도토스의 따르면 모든 도시들이 다른 도시들이 비겁하다고 서로 비난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오니아 발란은 밀레투스 파괴됨으로써 실패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자 이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세게는 한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오니아 반란에 참여했지만 자기가 보기에 아직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은 세력 즉 아테네를 처벌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서 설명되었던이 아테네의 대표단은 이전에 페르샤의 지배를 받는 것에 동의하기가 했기 때문에이는 페르시아가 보기에는 명백한 반역이 있습니다 게다가 다리우스의 옆에는 아테네에서 쫓겨난 히피아스 있었고 그는 아테네 원정을 계속해서 부추겼습니다 히피아스
아테네로 돌아가 다시 권력을 잡고 싶었고 다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측근이 된 히피아스게 아테네를 맡길 경우 자신의 지배력이 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대제국 페르시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