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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단상.-기독교의 사랑을 중심으로-
0.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생각하면 할수록 애매(ambiguous)해요.
연인끼리의 사랑만 해도,
『Baby, you don’t have to worry 걱정할 필요 없어
I’ll be coming back for you, back for you, back for you, you 널 위해서 난 언제든지 돌아갈 테니까
Lately, I’ve been going crazy 요즘, 난 계속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
So I'm coming back for you, back for you, back for you, you 난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거야, 널 위해서』
원디렉션(One Direction) - Back For You 中
(출처_유튜브 <자급자족하는 폴랑>)
연애 상대에게 내가 귀하를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돌아가겠다는 달콤한 말도 「사랑」이라 부르고,
『I know they'll be coming to find me soon 사람들이 곧 나를 찾으러 올 거란 걸 알지만
But I fear I'm getting used to being held by you 네게 붙잡혀 있는 데에 익숙해지는 내가 두려워
Baby, look what you've done to me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봐
Baby, look what you've done now 네가 지금 한 짓을 보라고
Baby, I'll never leave if you keep holding me this way (Ooh ooh) 네가 날 이렇게 계속 붙잡는다면,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원디렉션(One Direction) - Stockholm Syndrome 中
김폴랑 사랑해
다소 피학성애.... 같은 말도 「사랑」이라 부르니 너무 일관성이 없어 보이죠.
이뿐만 아니라,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수많은 함의를 쉽게 어떠한 '느낌'이나, '감정'과 동치 시키기도 해요.
『그녀를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신기하게 자꾸만 숨이 멎는 게 참 이상해 설마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사랑이란 감정일까』
방탄소년단 - DNA 中
그 '느낌'을 근거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상대방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 '느낌'을 받기를 원하죠.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고요.
특히 현대에는
『현대 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적 성격은 이러한 요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올해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 또한 상호 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현금 또는 할부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다. 그는 (또는 그녀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중략)
...... 내가 거래를 하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는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아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도 나의 명백한 또는 숨겨진 재산과 능력을 고려한 다음 날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에리히 프롬 -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15-16p
프롬의 지적처럼 '거래의 사랑'을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오늘날 연인들 사이의 관계는 (빈번하게) 시장에서 흥정하는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에 대응하곤 한다는 설명은 불쾌하지만, 반박하기 어려워요. 이런 사랑의 방식을 추구하는 이들은 애인을 '고르기' 위해 돈을 쓰고, 치장을 하죠. 또 그 애인이 자신의 투자에 걸맞은 보상과, 눈웃음을 보이기를 '정당하게' 요구합니다.
만약 서로의 등가 관계가 깨진다면, 예컨대 연애상대가 더는 매력적이지 않거나, 돈을 지불하지 못하거나, 적절히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금세 깨지게 될 거예요.
그 결과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넘어서는(그렇다고 믿는) 상대를 사지 못해 안타까워하거나, 성공적인 장사에 번번이 실패하여 힘들어하곤 합니다. 이 또한 「사랑」이라고 불려요.
정리하면요, 이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족과 같은 상호 간 유사성을 지니지만, 또한 가족이 그러하듯 확실하게,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닮은 부분은 없어 보여요. 요컨대 서로 다른 사랑의 현상들 사이에 엇갈리는 유사성이 있어도, 총체적으로 묶어주는 명백한 무언가를 규정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거죠.
너진똑을 열심히 보시고, 변방 갤에서 이 글까지 읽고 계시는 분들은 "사랑"과 '사랑',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인과 중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갤주의 미칀 설명으로 이미 잘 아시리라 믿어요. ㅎ
그럼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요?
어떤 사랑을 우선으로 두고, 어떤 사랑을 찬탄해야 할까요?
네. 뭐.. 아시잖아요?
" 젠장 또 아가페ἀγάπη 야!! "
그럼에도,,(준무교지만) 아가페가 다른 사랑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아가페를 증명했다고 알려진 성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기를 요구하는지 쫌쫌따리..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일단 전 전공자가 아니기에, 또 (아직) 신도가 아니기에 실수가 있다면 지적해 주세요!
1. 저는 사랑ἀγάπη한다는 것을 '약속'으로 보기를 즐겨요. '약속’이란, 일종의 '계약' 과정이에요. 다시 말해 상호 간의 합의로 설정한 조항을 지켜내기 위한 모든 노력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과정이죠.
내가 당신을 사랑ἀγάπη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나의 감정 너머에 있는 의무이고, 내가 지켜내야만 하는, 정서의 혼란으로 쉽게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 이예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감내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바로 상대방을 사랑ἀγάπη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는 제가 히브리 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아래에서는 이를 설명하려 해요.
2. 유대-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신이 '언약'이라는 꼴로, 즉 약속으로 피조물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이에요. 언약사상은 개혁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예요. 언약이 신약과 구약을(그리고, 구약교회-이스라엘 민족-와 신약교회-그리스도인-를) 하나로 엮어주는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이죠. 또한 16세기 개혁주의의 언약신학부터, 20세기 발터 아이히로트 이후의 구약성서 신학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언약을 히브리 신화의 주 동력으로 인정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이 '언약'이라는 놈을 기독교 4부에서 본 적이 있어요.
『자, 구약 성경에는요 '언약'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과 인간이 맺은 약속을 의미하죠.
하지만, 우리가 흔히 하는 가벼운 의미의 약속은 아닙니다.
'언약'을 다르게 번역하면 '계약'.
그러니까 "언제 한번 밥 먹자" 수준의 약속이 아니라 변호사 데려와서 인감을 꽝! 찍는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계약이고 서로의 명예를 걸고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강력한 맹세죠. 』
너진똑 기독교 4부 中
선악과를 먹어 저주를 받았다는 내용의 에덴 언약부터, 홍수...로... 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는 노아 언약 등의 일곱 가지 언약들을 구약에서 확인할 수 있고, 피로 맺어진 새 언약과, 빛나는 샛별이라 자신을 지칭하신 분이 끝의, 끝에서 맺으신 언약(혹은 언약의 완성)을 신약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이때 언약(특히 구약)의 재미있는 점은, (a) 언약을 맺는 두 주체(이스라엘 민족-야훼)가 서로 비상응적이며 (b)한 쪽(야훼)이 무한하게, 조건 없이 베푸는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일곱 민족을 싸그리 죽여.. 버리려는 분들이.. 고백하셨듯이(신명기 7:7-9) 사실 인간과 신의 약속에서 인간은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해요. 또한 지급을 이행할 능력도 부족하죠. 요컨대, 성서에서 체결되는 계약은 오늘날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둘 중 한 명이 깜빵 가거나, 벌금을 낼 불공정 계약(unconscionable contract)의 꼴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배품과, 자기희생을 "받을 자격 없는 호의", "무조건적 선물"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χάρις, 즉, '은혜(Grace)'라 지칭해요. (수직호혜적인!ㅎㅎ)
3. 사랑은 언약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사랑을 언약이라고 해명해요. 수직축(하나님-인간)과 수평축(인간-인간)은 동일한 언약 구조를 공유하기에, 인간 사이의 사랑은, 신이 보여준 언약이 사랑임을 보인다면, 마찬가지로 언약으로 해명할 수 있어요. (마태 22:37-40)
그래서 아래에서는 먼저 예수의 삶의 특징들로 사랑을 고민해 보고( (1), (2), (3), (4) ), 언약과 사랑을 엮어볼 거예요.( (5), (6) )
(1)
(화자는 예수)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무엇을 위해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
제가 처음 복음을 읽고 가장 놀랐던 건, 예수가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는 거예요. 기독교 2부에서 지적한 바와 정확히 일치해요.
저는 복음을 읽기 전까지 예수를 흔히 이야기하듯 뭔가... 초탈해 있고, 고통에서 벗어나있고... 그렇기에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떠올리곤 했어요. 그러나 실제 제자들이 증언한 예수는 너무나 인간적이죠. 그는 분노하고, 아파하고, 배고파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웃고, 또 젊게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너무나 예수가 고통받는 존재로 그려지죠.
저는 몰트만을 따라 하나님을 '고통받는 존재'로 이해하기를 좋아해요. (종말론은 입장이 조금 달라요. 안 다룰 거!) 저는, 예수가 분명 사람으로, 고통받았다고 생각해요.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거센 항의를 감수하며, 또 매우 매우 더러워졌죠. 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전한 말을 기록한 신명기에는요,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어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고 합시다. 그를 나무에 매달았다고 합시다.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단 채 밤을 넘기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날 그의 장례를 치르도록 하십시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 그대의 하나님이 그대에게 나누어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신명기 21:23)
이라는 기술이 있어요.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당대 전통적인 유대 민족은 성서에 따라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었죠. (갈라디아서 3:13-14)
예수는 유대 민족에게 명백히 저주받은 자로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로마인들을 볼까요?
로마는 공화정 초기에 제정된 Lex Valeria가 시민에게 상소권을 부여하고, 뒤따른 Porcian law들이 상소권을 로마 시외와 속주 주둔군까지 확대하며, 채찍형(일반적으로 십자가형과 불가분 관계라고.. 해요.)을 금지하고, Lex Sempronia de capite civis가 민회 재판 없이 시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도록 절차적 안전장치를 마련했어요.
이 연속 입법 덕분에 '로마 시민은 일반 범죄에서 채찍·십자가형으로부터 보호된다’는 관습이 자리 잡았어요.
그리하여 (a) 법적으로는 노예가 아니면서, 시민권을 가진 자유시민은 사실상 십자가로부터 통상적으로 보호되었고 이로 인해 (b) 사회적으로는 노예, 속주 반란자, 해적 등 인간 취급을 박탈당한 존재들에게만 십자가형이 집행된다는 통념이 확고해졌어요. (c) 정치적으로는 황제는 이 형벌을 연출적 도구로 사용해 반란을 짓밟고 질서를 광고했어요. 십자가형은 그만큼 최하위 노예들을 위한 형벌이었죠.
당대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라는 것은 입에 담기도 천박한 것이었어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를 저주하여 마땅한 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죠.
예수는 명백히 저주받은 자로 죽었습니다. 예수는 유대 민족에게 '신성 모독자'이며 '더러운 자'로, 로마인들에게는 '천박한 자'이며 '반역자'로 죽었어요.
그리고 그 저주 속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 마가 15:34)며 항의했습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볼지에 따라 많은 입장이 갈리겠지만, 일단 지금의 저는, 위에 밝혔듯 몰트만의 견해를 따라요.
즉...
예수는 저주받은 예수는 분명. 고통받았습니다.
또한 더없이 거세게 항의하는 자였습니다.
(2)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데 있어요. 그가 창세기의 창조주와 동일 본질이며, 오로지 그만이 가장 높은 곳에 계시다 고백하는 것으로 신앙은 시작됩니다. 그러니, 삼위일체론에서 도출한 십자가에 박힌 분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결론은, 위 관점에서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고통과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아버지는 아들을 버림으로써(마태 27:46, 마가 15:34) 고통에 있고, 아들은 못 박힘으로 버림받아 고통 안에 있고, 성령은 고통받는 이들의 저항 속에 임재하기에(그 사건으로 드러나기에), 고통을 겪는다는 거죠. (몰트만은 세 위격의 상호적 관계를 '하나님'으로 보았는데요, 저는 동일본질에 더해, 동일주체도 어느 정도 인정해요. 아직 부족해서 알쏭달쏭..)
그렇기에 사람의 아들 안에 계시는 분은, 가장 낮은 곳, 모두에게 저주받는 곳까지 내려오십니다. 그분은 너무나 인간적이셔서 고통받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고통에 분노하시고, 항의하시죠.
이때 고통이란 무능력, 무관심이 아닌, 아니라 연대를 의미해요. 예수가 고통당한다는 이야기는, 지금-여기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두와 함께한다는 선언이에요. 신정론적으로는, 세상의 부조리와, 악에 희롱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신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함의하죠.
(3)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ἐκένωσεν(ekenōsen, 에케노센(케노시스의 동사형))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절)
조금 더 예수의 삶을 톺아보도록 해요.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 특히 1세기 유대 사회는 확장 가족(extended family) 중심이었어요. (베이트 아브(בית אב, bet av) 형태가 일반적)
당시 유대 사회는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가족 사회로, 대개 한 마을은 하나의 가족처럼 구성되어 있었고, 주민들은 서로 깊은 유대 속에 살아갔어요.
일상적으로는, 하루의 노동을 마친 후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이웃들과도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해요. 매일 이웃 전체가 식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잔치나 초대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웃 간 식사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안식일(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을 거룩하게 지켰어요. 이때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안식일 식사를 나누고, 포도주를 축복하며(키두쉬), 빵을 떼고(하모찌), 시편 찬양을 부르거나 토라 구절을 암송했다고 해요.
그러나 모든 이가 이런 공동체적 유대 속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사회적으로 정결성을 상실했다고 여겨진 이들, 예컨대 나병환자, 세리, 창기, 공공연한 죄인 등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거나 배제 었어요.
나병환자는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 물리적으로 격리당했고(레위기 13-14장),
세리와 같은 직업군은 부정한 로마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종교적·사회적 공동체에서 배척당했습니다. 이들은 외로움과 절망에 빠지는 것뿐 아니라, 법적·종교적으로도 공동체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회적 무권리 상태에 놓였어요.
이때 예수는 자신의 식탁에 그들을 초대해요. 현대에도 그렇듯, 우리가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지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예수는 당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과 식사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요. 또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하기도 해요. 이런 모습은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이(요한복음 1장)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걸 입증해요.
이런 예수의 삶의 특징을 총칭해 '케노시스'라고 일컬어요.
'케노시스'는 본래 '비움'이라는 뜻이에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설명해요. 또한 위와 같이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 방식, 요컨대 저주받는 것, 더러운 곳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직접 들어가는 행위 또한 자기 비움의 과정으로 '케노시스'라 불려요.
(4) 그리고 이 같은 그의 삶의 궤적, 즉 (a) 악에 반항하고 (b) 가장 낮은 곳까지 함께하는 것은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하며 '의(dikaiosyne, 옳음)'롭다 선언돼요.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신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라고 믿는 데 있어요.(또한 "살아났다"라고.) 이것은 위의 '예수가 고통받았다'는 사실과 엮여 제약 없는 희망으로 작동해요. 모든 고통받는 것들과 연합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은, (A)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고 입증된 것이고 (B) 예수가 행하였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고 입증된 것이고, 그렇기에 (C) 우리는 예수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고 (D) 그 뜻에 맞추어 살 때 비로소 세상이 그와 같이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이 긍정되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이 희망은 대단한 실천력을 가져요.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죽고' '병에 걸리고' '눈이 멀더라도', 또한 "그리스도"가 창궐해 그가 '죽더라도' 반드시 '살아난다'라고, 모두가 '살아난다'라고 믿을 수 있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조리를 넉넉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반항할 용기를 얻을 수 있죠. 그리고 이때에 우리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ἀγάπη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요.
그리스교의 사랑은 고통을 함께하려는 노력이에요. 외부적 고통을 함께 저항하면서도,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정중히 초대하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떨어트리고, 바꾸고, 또 불편하게 하는 노력이죠. 그러니 사랑은 필수적으로 고통을 수반해요.
그리고 이 과정은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정리되죠.
(5)
세상 창조 이전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에페소서 1:4)
칼 바르트는 에페소서 1:4에서 시작해 '하나님의 자기 결정(selbstbestimmung Gottes)'이라는 개념을 제시해요.
바르트는, 그리스도 세계관의 신이 천지를 조물 하기 이전, 창조의 이전 상황을 고민합니다. 시작 이전의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결정해요. 자신은 누구인지,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 말이죠. 이를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기 결정(selbstbestimmung Gottes)'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그 결정은... "인간을 사랑하겠다" 이죠!
기독교의 하나님은 결정해요. 당신이 세상의 창조 전부터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기를, 즉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과 만나시기를 결정해요. '나는 예수로 하여금 인간을 사랑하겠노라', '인간을 위하는 자가 되겠노라'라고 영원의 이전에서 먼저 약속하셨다는 거죠.
바르트는 말해요. 그리스교가 모시는 신은, 인간과 맨 처음으로 사랑을 약속하였고, 때문에 이후의 모든 역사, 예컨대 창조와, 유지와, 운행의 온 과정이 약속의 성취과정이라고요.
이때,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이 시작의 이전부터 사랑을 약속하셨기에, 세상에는 버림받는 사람이 있을 수 없어요.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선택되었고, 인간으로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므로 바르트는 언약을 사랑으로 이해해요. 인간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조물 곁에 있기로 선택해요. 인간이 당신을 떠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는 순간(죄)에도 사랑은 이루어져요. 설령 우리가 먹구름이 낀 세상에 분노하다, 조물주에게 분노하고, 반항하더라도, 하나님은 먼저 무제약적인 화해의 요청을 건넨다는 거죠. 모든 만유는 사랑 아래 있으니까요!
(6) 그러니 그리스도교에서, 신과 인간의 사랑이 정녕 언약이라고 믿는다면, 인간과 인간의 사랑 또한 언약으로, 약속으로 검토될 수 있어요. 이때의 사랑은
(a) 세상의 부조리에 함께 저항하겠다는 다짐이며 (b) 그 어떤 낮은 곳이라도 함께하겠다는 결심이고 (c) 그것은 사랑을 결심한 자에게서부터 제약 없이 시작돼요. 또한 (d) 마법이 끝나고, 사랑하는 대상의 반응이 바뀌어도, 조건에 휘둘려 쉽게 파기되지 않으며 (e) 약속을 지키겠노라 노력을 다한다면 영원하게 이루어지죠. 즉, (f) 사랑을 약속이라 믿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줄 수 밖에 없어요.
4. 그러니까요...
저는 여러분들을 사랑하고자 해요. 우리는 아마 서로 직접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 말로만 사랑을 주절거릴 거고, 우리는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미묘한 감정을 헤아릴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을 마땅히 사랑하기에, 앞으로의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수많은 사랑의 약속을 맺으려 해요. 그 사람이 혹여 사랑으로 자신의 세계를 채워, 사랑의 약속을 맺겠노라고 다짐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또 다른 약속을 걸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게 또 다른이와 약속을 걸고, 또 건다면, 그리하여 제가 약속으로 걸리고, 또 걸린다면, 훗날 수많은 약속아래 우리가 사랑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어요.
또한 저는 여러분들이 주신 사랑을 지켜내려 해요. 그것에 감사하고, 또 찬탄하려 해요. 그렇기에 날마다 여러분들의 삶의 평안을 기원하고, 또 그 사랑이 길거리 전단지만큼이나 흔해지지 않도록 삶에서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지켜내려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래서... 결론은..요
많이 사랑한다구요~>_<
이제 새 계명을 그대들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 자신들도 서로 사랑하세요! (요한 복음 13:34)
Q1. ‘사랑은 약속’이라면 감정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가?
A2. 언약적 관점은 정서보다 의지적 헌신을 우선해요. 그러나, 저는 프롬의 말처럼 이별이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해요. 또 사랑을 주는 사람 만큼이나 받는 사람이 감사를 표해야 사람간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해어지지 말자!'
Q2. 현대 사회에서 ‘무조건적 약속’은 가스라이팅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
A2. 약자에게 불리한 일방 강제를 정당화한다면 이미 언약의 정신을 배반해요. 무조건적이라는 수식은 ‘주도권 있는 쪽이 먼저 자신을 낮춘다’는 조건을 내포합니다!
Q3. 고통받는 하나님의 한계는?
A3. 고통받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전능에 대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몰트만은 전능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전능한 하나님이 ‘의롭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밝혀요. 즉 그리스도인에게만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 사랑이 언약이라는 관점은 인간 모두에게 일반화 시킬 수 있다고 봐요. 석가모니를 따르는 분들이 증거고, 또 여러분들이 그 증거죠!
[덧붙여서..]
이게...진엔딩을 보면 좀 달라질 것 같기는 해요. 그래서 혹시 진엔딩 보시려면, 이 글을 부디 사자처럼 읽어주세요! 한 구절씩 때오는 놈들은.....ㅋㅋㅋ
근데, (확실하지 않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을거에용. 나름 제외한게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