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유게시판 💬 일반잡담 ()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가?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가?
인간적인 잣대로 보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갈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엄격한 보상 법칙이 따르기 때문인데, 이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말씀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현재에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다음 세상에서 기회를 얻으려면 이 세상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가난하고 박해받고 무시당해야 하는 것이다.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잔치의 비유에서 이 점이 명확하게 표현된다(14,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 말씀하신다(루카 14,12-14)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산상 설교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청과 보상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요청에도 깔려 있다. 이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 주는 사람도 이와 같다. 형평에 대한 생각이 지나치게 계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솔직한 말씀 가운데 정의를 갈구하는 희망이 있다. 즉 가진 게 없어서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갈망을 생생하게 지닐 수 있고 또 지녀야 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도와주시며 치유하실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부자의 입장을 감안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라고 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는 뜻일까? 하느님께너느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씀 이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다른 내용을 제시한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후회하고 회개하게 하신다. 하느님만이 단단한 돌도 말랑말랑하게 바꾸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부자를 회개시켜 가난하게 살아가도록 움직이실 수 있다. 여기서 그분의 위력이 발동한다. 그렇다면 부자에게 올 기회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에만 달려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가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진다. 부자가 반드시 부자로 머무를 필요는 없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거싱다. 하느님께서 그를 움직이신다.
예수는 어느 때 사람을 부자라고 하는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부자라고 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마르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논리가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떠날 수 없다.
그는 예수보다 재산에 매여 있다. 이것이 그분께 품은 인간적인 호의보다 훨씬 강했다. 부자 청년은 재산에 집착했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 그는 재산을 우상처럼 사랑한다. 벗어나야 하는 우상에 마음이 단단히 매여 있는 사람 같다. 부자는 재산이 많든 적든 부자유스럽게 매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분명한 점은 사랑이 성경적 신앙의 본래 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전지면서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를 따르는 길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가? 너의 동경이 돈으로 충분히 해소되는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적인 동경이 남아 있다가 마지막에야(최종적인 우선권에 대한 투쟁이 끝나고) 하느님께로 향하는가?
사랑에 대한 이러한 질문 외에도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다른 길이 하나 더 있다.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 발칙한 표현은 다음과 같이 좀 더신심 깊은 말로 다듬을 수 있다.
성당 짓는 일이다.
그러나 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에 대한 비유의 결말은 처음에 비해 덜 불편하고 덜 도전적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루카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돈으로 친구를 구하라는 말보다 더 불쾌한 것은 없다. 돈을 세탁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주는 것이 돈을 세탁하는 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너희가 가진 돈은 늘 불의에서 오는 것이다. 그 돈에는 불의가 달라붙어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늘 착취당하고 이자를 내고 적은 임금을 받지만, 다른 누군가는 큰돈을 벌어들인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며 앞으로도 달라지기 어렵다. 그러나 너희는 돈을 세탁할 때 감추어 둘 만한 곳이 있다. 바로 성당을 짓는 일이다. 교회는 내일이면 문 닫을 공동체가 아니다. 먼 미래까지 존속할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텍스트는 무언가 나누어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말할 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아주 단순해지고 말 것이다.
교회는 다시 그저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만 위해 일한다. 그렇게 하여 주변적인 일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나눔을 통해서 친구를 만들라고 한다. 그러면서 주고받는 계산을 분명히 한다. 그분이 우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부자에게도 전파될 수 있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친구란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존재이다. 오늘날에 맞게 표현하면 이러하다.
몇몇 사람이 자신을 위해 신심 깊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데서는 교회가 탄생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값진 것을 진정으로 서로 나눌 때 교회는 실재가 되고 교회에 약속된 것이 활발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면 시간 · 기쁨 · 운동 · 돈 · 음식 · 취미 ·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서로 나누는 것이 구체적일수록 공동체도 더 완전해진다. 예수에게 관건은 늘 '내일모레'이다. 집사는 내일 쫓겨나겠지만, 내일모레가 되면 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형성된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는 내일은 살아 있겠지만, 내일모레가 되면 너희를 잊지 않는 공동체에, 퇴직해서 연금을 받을 때뿐 아니라 훨씬 더 나중까지 공동체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 나눔을 받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영원한 거처'에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었거나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죽은 다음에 맨 처음 본 사람은 친척이나 친구들 또는 최근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그곳의 너희를 받아들일 친구들 덕분이다.
대중 신심도 이렇게 말한다.
하늘나라 입구에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아니다. 유다인들에게 에녹이 서 있듯, 우리에게는 베드로 사도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베드로와 천사들 그리고 돌아가신 성인들이 서 있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그곳에 들어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한다.
친구들을 만들어라!
이 말을 우리는 망설임 없이 교회에 적용해도 된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를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 성인들의 공동체이다(신앙고백에서 망각된 사항). 우리는 교회가 종말까지 존속한다는 것에 의지하고 있다. 나는 위충, 아래층으로 나뉘어 구성된 제도 교회보다 친구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선호한다. 예수의 저 말은 사실 불쾌하기 그지없다. 여기서 관건은 구원과 연관딘 된으 의미이기 때문이다. 돈과 돈을 사용하는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 금기 사항이다.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돈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이런 금기를 부순다. 그는 우리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돈으로 무언가를 하라고 요청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요청이다.
성인들의 공동체를 설립하라!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돈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성인들의 공동체를 설립하라!
사실 하느님은 우리 돈이 필요 없으시다. 하늘나라라고 부르는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는 독방에 머물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하고만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진짜 관건은 우리가 믿는 성인들의 공동체로,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가의 여부이다. 하느님께서 우레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성인들의 공동체, 한 가지뿐이다. 우리가 여기에 속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앞에서 함께할 공동체가 필요하다. 고대 교회는 성찬례에서 축성에 이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믿음의 표지 안에서 저희보다 앞서 간 당신의 종돌을 생각하소서. 저희는 저희를 잊지 않고 먼지처럼 흩날리지 않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나이다. 누군가가 저희를 생각하고 저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나이다. 기억하는 것이 저희가 바라는 전부이옵니다.
내 고향의 본당신부는 모금할 일이 생기면 헌금하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헌금할 돈이 없는 사람은 기도로도 도울 수 있습니다.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기도는 두 번째로 좋은 길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잘 안다.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을 위해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우리 마음이 돈에 매여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구체적으로 헌금이라고 하자) 교회가 공동체로 결성된다. 우리가 돈지갑을 열지 않으면 어떤 믿음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규모의 사설 은행가들로만 구성된 백성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서로 믿고 다리를 놓는 백성, 무엇보다 돈으로 다리를 건설하는 백성을 창조하셨다. 우리가 돈지갑을 여는 순간 마음도 즉시 뒤따른다. 그것이 주님께서 본디 원하시는 바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최근에 이 문제를 놓고 이의를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돈으로 관계를 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 달리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고상하고 늪은 수준의 영적인 관계에 대해서만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주어야 한다. 그리고 받기도 해야 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모큼 마케팅'은 굶주리는 사람들의 비참함만 강조하지 않고 인간의 품위를 강조하면서 그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외친다. 물론 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재물은 우리의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억지로 절약했다는 것을 월말 계산하면서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 나는 신약성경학자라는 직업에 감사하며 이렇게 바라본다.
그리스도교가 거의 종점에 다다른 곳으로, 젊은 신학자들의 신앙 위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니면 내 방식으로 '선교'라는 고통스러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묻는다.
그 말은 업적을 쌓아 정의로워지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에게 아무 비용이 들지 않고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에 어떤 의무도 지우지 않으면, 우리는 자비의 종교에 쉽게 편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돈지갑을 열 때 비로소 거룩해집니다.
우리는 돈지갑을 심장 바로 앞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우리에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돈을 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업적을 쌓아 정의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 무언가를 내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루터가 힙겹게 고투하며 정립한, 은총만으로 구원된다는 가설은 이미 오래전부터(종파를 초월해) 온갖 종류의 게으름, 무위無爲, 무관심을 변호하는 닳아빠진 구실이 되었다. 우리가 언젠가 이 사실을 파악할지도 모르겠다. 더 심각한 것은, 은총론을 잘못 적용해 어떤 성인 공동체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가는 것은 선한 업적을 쌓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주일에 집에 있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넘치도록 많다. 예수는 이러한 위선적 행동을 꿰뚫어 본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바로 여기에 이 텍스트가 지닌 유일한 가치와 보물이 놓여 있다. 예수는 우리가 도망갈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네 마음에 어디에 매여 있는지 말해 다오. 바로 그곳에 네 보물이 있다.
예수는 우리의 도주로를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의 이런 말 때문이다.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돈을 내기는 싫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성인들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런 소리 그만하고 돈을 내라!
빛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에 대해 언급한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 빛은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낱말이다. 그리스도교는 마조히즘(이성으로부터 정신적 · 육체적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 심리 상태)이 아니다. 희생을 위해 삶을 적대시하지도 않고, 아무런 전망 없이 고통만 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빛의 순수함과 가벼움과 선명함을 약속한다. '빛'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부활, 봄, 온갖 두려움의 종결을 뜻한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와 함께 멋진 구식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흑백사진을 찍으며 빛과 그림자가 서로 어우러지는 현상을 관찰하고 포착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빛에 애착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어두운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렇다.
그리스도교는 빛의 자녀들과 성인들의 공동체이다. 하느님은 빛의 아버지시다.
몇 해 전에 오랜 친구인 예수회 사제 오스발트 폰 넬브로이Oswald von Nell-Breuning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론과 실천으로 그리스도교 사회론을 옹호한 스승이었고, 몇 안 되는 노동조합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신학자로서 공동 결정권을 얻기 위해 노력한 투사였다. 100세 생일을 맞은 그가 소감을 멋지게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었다.
나는 큰 희망을 품고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내가 그동안 돕기 위해 애썼던 많은 노동자들이 내 옆에서 기도하며 지켜 주기 바랍니다.
이 말이 앞에 나온 비유에 대한 가장 최근의 해석이자 최고의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삶에 대한 동경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빛과 사랑에 초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향해 '큰 희망을 품고' 맞이할 수 있다. 이 길을 혼자 걸어간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예수》, Klaus Berger 지음, 전헌호 번역
-------------------------------------------------------
클라우스 베르거(1940~)는 2006년에 은퇴한 가톨릭 신약학자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친 독특한 이력이 있다. 발췌한 책은 성 바오로 수도회에서 출판되었으며, 표현이 도발적인 감은 있으나(만약 내가 비슷한 글을 쓴다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라는 갈라 5,6 구절을 인용하며 온건하게 표현했을 것 같다) 나는 베르거 교수의 글이 마음에 든다. 그리스도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루터 시대의 기억 때문인지 어쩌면 터부시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인 베르거 교수가 직설적으로 돈 이야기를 꺼낸게 돋보이며 발언의 상당 부분을 나는 공감한다.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자면, 베르거는 '예수님께서는 제도적 공동체에 적대적이였으며 신앙에 있어서의 개인주의를 전파하셨다'는 식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며, 부부로 표현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혹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강조하는 편이다. 즉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하느님과 나의 관계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식의 어쩌면 우리 사이에 퍼져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저자는 반대한다고 보면 되겠다. 위의 책과는 다른 책을 하나 더 발췌하며 글을 마치겠다.
※ 직접적인 발췌문을 제외하면, 이 글은 권위도 학위도 지니지 않은 평신도로서 제가 쓴 글입니다. 정보나 의견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근대 개인주의와 아노미의 요람인 도시들은 16세기만 해도 시골만큼이나 공동체와 집단을 중시했고, 주민 모두의 도덕적 안녕을 책임지는 성스러운 공동체임을 자처했다. 시민적 인민주의 정신에 물든 츠빙글리와 마르틴 부ㅊㅓ의 신학이 고독한 수도승 마르틴 루터의 신학보다 도시민들에게 더 어필한 이유를 공동체의 이런 성격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초기 사람들은 남편, 아내, 자식, 장인, 도제, 이웃, 길드원, 동료 교구민으로서 서로에게 크게 의존했다. 그들이 천국 역시 함께 가기를 원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중략)
개념으로서의 가난과 구원 드라마의 참여자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은 중세 가톨릭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난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사도들의 유산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이번 생에는 고통받을지언정 다음 생에는 그리스도의 총애와 보상을 받을 터였다. 교회는 걸식하거나 탁발하는 수사들이라는 형태로 가난을 제도화했고, 그들은 설교에서 부자들의 자선 부족을 질타했다. ‘자선(charity)’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불우한 이들을 향한 이타심을 뜻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동반자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돌려주는, 사회관계가 바로잡힌 상태를 뜻했다. 빈자들에게 적선하는 것은 자애로운 행위, 결국 기부자 본인이 구원받는 데 도움이 되는 선행이었다. 빈자들에게도 이번 생과 다음 생에서 기부자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자선 의무가 있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