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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원수를 사랑하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원수를 사랑하라
<마5:38-4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반면
신약의 예수님은 그것을 뒤집어서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서로 다른 분인가? 아니다. 동일한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으로/성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동일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하나님과 아주 상치된 말씀을 하시곤 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고 하셨는가 하면,
예수님은 간음한 자를 용서해 주셨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안식일 날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물에 빠져 죽게된 짐승을 살려주시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란 인간 육신을 포함한 물질계의 창조가 있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시는 심령창조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 및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알려주시는 심령창조에 있다.
그리고 물질계의 창조이든 심령계의 창조이든 창조란 반드시 창조의
시작에서 창조의 완성을 향해,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달려가는 진행형이므로 “진화론적 창조” 인 것이다.
진화론적 심령창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을 상대로 하신 구약은
사실 엄밀히 말해 창조의 시작에도 들지 못하고 다만 창조의 프로젝트를
세우신 그림자 시대에 불과하다 하겠다. 예수님이 전세계인을 상대로
오신 분이므로 진정한 창조의 시작과 실상은 예수님 때부터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오늘날 예수님의 재림 때는 창조의 완성이 된다. 그렇지 않는가?
이같이 진화론적 창조에서 볼 때,
저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는 창조의 프로젝트인 원칙을
세우신 것에 불과하며, 엄격한 원칙이므로 너와 내가 전혀 양보 없이
서로 밀어내는 상극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뒤집어서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셨는데
원수사랑은 서로 품어주는 상생을 보여준다.
서로 감싸 안아 품어주는 원수사랑은 진정한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창조란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된다.
예수님이 그 사랑의 심령창조를 시작하신 분이므로 예수님(하나님)은
창조의 알파이며, 그분이 또한 다시 재림하셔서 사랑의 창조를 완성하실
터이므로 오메가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의 엄격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그것을 뒤집는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서로 완전히 동격이어야 하며 서로 완전히 동일한 창조의 내용이어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알아보기로 한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 인간생활의 도덕과 윤리를 기록한 것이며 모든
기독인들은 그 기록대로 문자적 율법을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따라서 회개와 감사의 소재도 그 문자적 율법을 준수했는가 못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는 모두 삼천포로 빠지는 망할 길이다.
왜냐면 성경은 하나님의 깊은 창조의 내력을 감추신 비유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깊은 창조의 내력을 감춰서 기록한 비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사유는 싫든 좋든 창조주 하나님의
원초적 심장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위 기록이 창조주 하나님의 원초적 창조의 근본이 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물질계 창조이든 심령계 창조이든 아직
창조가 아무 것도 되어진 것이 없는 창조 이전을 뜻한다. 즉 창조 이전이므로
하나님의 창조가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창조를 출발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창조를 출발시키게 되는 이때 하나님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했다.
깊음은 물을 뜻한다. 따라서 흑암도 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도 물 위에
있다. 물은 창조의 소재인 말씀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신은
빛의 하나님으로서 물위에 있고(성령), 흑암은 빛 되신 하나님과
대결/대치되어 있는 또 다른 하나님(악령)으로서, 즉 마귀로서 물위에 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그 근본이 빛의 하나님이자 흑암의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근본이 빛이자 흑암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를
진행시키면 빛도 드러나고 흑암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것,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선악간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분신들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궁극에는, 즉 창조완성에서는 악은 없고 선만
있기를 바라신다. 어둠은 없고 빛만 있기를 바라신다. 처음엔 비록 선악이
함께, 어둠과 빛이 함께 드러나는 창조였으나 마지막 완성에서는
하나님 자신속에 있었던 흑암을 몰아내고
100% 모두 빛으로만 남기를 바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자신속에 있는 반절의 빛이 반절의 흑암을 몰아내고 백프로 빛으로만
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그 치열한 싸움을 일컬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철저한 원수 갚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몰아내고 죽여야할 원수가 멀리 있음이 아니고 자신속에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패턴의 싸움이 하나님 자신의 창조이며 하나님 분신들(인간들)의 창조이다.
그러면 문자적으로는 이에 반하는 예수님의 원수사랑은 어떤가?
내 속에 천사가 있고, 내 속에 악마가 있으므로 원수는 멀리 있음이 아니고
내속에 있다고 이미 밝혔다.
하나님은 내 속에 있는 원수를 무자비하게 무찔러서 창조완성에 이르라는
뜻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셨으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도리어
내 속에 있는 원수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원수는 흑암이다. 그 흑암 부분에 내 속에 있는 빛을 투사해서
흑암을 빛으로 이끌어내고 빛으로 충만시킴으로서 내가 온전히 백프로
광명체가 된다면 흑암 부분은 빛의 사랑을 먹고 빛으로 대전환이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가 성립된다.
이렇게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원수를 갚으라거나 그 반대로
예수님의 원수사랑은 문자적으로는 상반된 말이지만, 그 감추어진
깊은 내용으로는 동일한 창조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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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원수를 사랑하라 (안티와 예수의 대화) | 작성자 티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