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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이대로 괜찮나 f.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수 [더 릴리전]
한국 개신교의 역사와 주요 성장은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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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도입 및 느린 성장 (19세기 말 ~ 20세기 초)
- 한국 개신교는 1884년에 첫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가톨릭은 이보다 100년 앞선 1784년에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의 군종으로 왔던 예수회 선교사의 방문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 개신교는 처음에 약 20년 동안 교세가 거의 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선교사로 들어오기 어려웠기에, 교육자나 의사로 들어와 병원과 학교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후 새문안교회나 정동교회 같은 교회가 세워졌지만, 성장은 미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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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폭발적 성장: 평양 대부흥 (1907년)
- 개신교 숫자가 처음으로 크게 늘어난 사건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특히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평양과 황해도 등 서북 지역에서 신자 증가에 기여했습니다.
- 부흥 운동은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 중에 일어났습니다. 저녁 기도회 중에 성령이 임했다고 표현되며, 길선주 장로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친구의 재산을 유용한 것)를 회개하자, 수천 명 앞에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회개와 성령 체험은 매일 집회에서 반복되었고, 이 경험을 한 사람들이 고향 교회나 학교(숭실, 평양신학교 등)로 돌아가 열기를 전파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 1909년에는 교단 연합으로 100만 명 전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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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폭발적 성장: 산업화 시대 대규모 집회 (1970년대 이후)
- 그다음으로 교세가 크게 늘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한국의 산업화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에 교단 연합으로 여의도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같은 유명한 부흥 강사들이 초청되었으며, 당시 경제가 성장하고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던 시기에 국가(박정희 정부)도 이러한 집회들을 후원했습니다. 이는 유신 반대 운동으로 인한 기독교 탄압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미국 등 세계에 기독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수백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위해 공병대가 텐트를 쳐주고, 경찰/군대가 반주를 하며, 통금을 해제하고, 공용 버스 운행을 지원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 이러한 시기를 거치며 한국 개신교 인구는 1945년 인구 대비 5% 미만에서 1980년대 후반에는 거의 20%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성장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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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개신교의 영향
- 한국 교회는 압도적으로 미국식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록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 온 선교사들도 있었지만,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교회의 영향이 거의 전적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배 방식, 설교 스타일, 찬송가, 신앙 고백, 심지어 예배당 건축 양식이나 예배 순서 등에서 특히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는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과 함께 시작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 첫 번째 큰 성장을 경험했고, 1970년대 이후 산업화 및 대규모 연합 집회를 통해 두 번째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며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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