쎅의 아들 예수(Jesus ben Sec),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Jesus ben Damneus)
그리고 가마리엘의 아들 예수(Jesus ben Gamaliel)...
이 밖에도 바울은 자신의 경쟁자로 ‘또 다른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고 다니는 어느 마술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고린도 후서 11장 4절).
이들의 개략적 행적을 보면,
시라크의 아들 예수(Jesus ben Sirach):
이 예수는 구약의 계시록(Apocrypha )의 일부인 ‘시라크’란 책(전도서(Ecclesiasticus)
혹은 ‘시라크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로도 알려진)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서기 전 180년 희랍에서 저술활동을 한 이 사람은 유태의 지혜서와 호머 스타일의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묶어서 편집하였다.
판디라의 아들 예수(Jesus ben Pandira):
이 예수는 마카비(Maccabean)왕조의 가장 무자비한 철권 통치자였던
알렉산더 요내우스(Alexander Jannaeus, 106-79BC)치하에서 활동한 기인(奇人)이다.
사려깊지 못하게도 이 예수는 종말론적 사업에 투신하여 예언을 일삼고 사람들을 동요시켜서 왕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이 예수는 유월절 저녁에 나무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함으로서 자신의 자연수명도 살지 못한채 일찍 죽었다.
학자들은 이 예수를 엣센종파의 창립자로 추측한다.(참고로 이 예수는 통일교에서 잡았지요.^^)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Jesus ben Ananias):
서기 62년을 시작으로 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재앙이 닥칠 도시” 를 주제로
닥쳐올 재양에 대한 주문을 끝없이 되뇌이는 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매우 애매모호한 에언을 했다:
로마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채찍형을 받은 후,
이 예수는 미친 잡범 정도로 취급되어 석방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점령당시 로마의 투석무기 ‘카타펄트’로 던져진 돌에 맞아 죽었다.
사팟트의 아들 예수:
서기 68년 갈릴리 지방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폭동당시
이 예수는 타이베리아(Tiberias)(가난한 사람들과 어부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의 우두머리-요세푸스의 ‘생애’ 12.66)의 반란군 대장이었다.
도시가 베스파시안(Vespasian)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그는 갈릴리 바다의 연안에 있는 타리치아(Tarichea)의 북부로 도주하였다.
가말라의 아들 예수(Jesus ben Gamala) :
서기 68년, 69년 경에 당시 유대땅을 휩쓸던 내전에서 이 예수는 “평화 당”의 우두머리 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벽에 서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두민(Idumeans, 수자(Susa)의 아들들인 제임스와 죤이 이끄는 사람들)을 질책하였다.
이런 행동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두민들이 성벽을 깨고 (성을 점령한 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시체는 개들과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에게 던져졌다.
테부츠의 아들 예수(Jesus ben Thebuth):
서기 69년 (예루살렘)시의 북부가 마지막으로 함락되었을 때 성직자였던
이 예수는 성전의 보물을 (점령군에게) 헌납함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이 성전의 보물들 중에는 2개의 성 촛대와 순금제의 받침달린 잔, 그리고 성스러운 커텐과 최고 성직자가 입는 겉옷(장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리품들은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의 아들 타이투스(Titus)의 개선식에서 눈에 띄게 전시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ㅋㅋㅋ
스타다의 아들 예수(Jesus ben Stada)는 2세기 초 로마군에게 두통꺼리를 안겨준 말썽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25마일 떨어진 리다(Lydda)라는 마을에서 로마군의 십자가 처형조의 손 아래에서 그의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로마군의 보복전술의 규모로 고려해 본다면 예루살렘 포위의 절정기에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매일 500명이 넘는 포로들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는 정도이다.
예수라고 불리던 유대 영웅들은 문자 그대로 땅바닥을 겹겹이 덮을 정도로 많았다.
역사적 으로 기록된 여러명의 예수중 골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