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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전도사'의 피눈물 – 사역이 아닌 '감정 쓰레기통'과 '영업 실적'
내가 전도사라는 직함을 달고 교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뜨거운 열정과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사례비는 적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통 교회 일이었지만, 영혼을 살리는 고귀한 일에 쓰임 받는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교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작은 벽돌 하나라도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겪은 현실은 '사역'이 아니라 '감정 쓰레기통'과 '영업 실적' 채우기라는 참담한 깨달음뿐이었다.
내가 맡았던 주 사역은 심방과 교회 학교였다. 새벽 기도부터 시작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심방, 주말 교회 학교 준비와 진행, 각종 회의와 행사 지원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하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성도들의 '감정 쓰레기'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전도사님, 제가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밤 11시에도 걸려오는 전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끝없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전도사님, 우리 애가 속 썩이는데 기도가 필요해요!" 당장 달려가 위로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물론 성도를 돌보는 것은 사역의 일부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이나 에너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저 성도들의 부정적인 감정, 불만, 요구를 묵묵히 들어주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만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정작 우리의 힘듦이나 고민은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전도사가 힘들면 안 되지', '믿음으로 이겨내야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숨기고 괜찮은 척해야 했다.
더 비참했던 것은 '영업 실적'을 요구받았을 때였다. 담임목사님이나 부목사님은 늘 등록 교인 수, 교회 학교 학생 수, 모금 실적 같은 수치를 강조했다. "이번 달까지 새 신자 몇 명 등록시켜라", "교회 학교 인원 목표 달성 못 하면 전도사 자격이 있느냐", "부서 예산 더 타려면 후원 약정 더 받아와라"는 식의 압박이 끊이지 않았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아니라, 실적을 채워야 하는 영업직처럼 느껴졌다. 숫자에 목매달다 보니, 한 영혼의 아픔에 진심으로 다가가기보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교회에 등록시킬까' 하는 계산이 먼저 들 때도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위선적이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례비는 턱없이 적었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계속 쌓여가는 학자금 대출, 최소한의 생활비조차 빠듯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명감'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사명감을 요구하는 리더들은 좋은 차를 타고 넓은 사택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축복'을 간증했다. 그들의 풍요로운 삶과 우리의 궁핍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박탈감을 넘어 분노를 유발했다. '우리는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존재이고, 그들은 축복을 누릴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전도사가 벌써 지치면 어떡하냐",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다른 전도사들은 다 잘하는데 너만 왜 그러냐"는 식의 질책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 현실적인 처우 개선이었지만, 교회는 영적인 잣대와 무한 희생만을 요구했다. 탈진하고 병들어 쓰러지는 전도사들이 하나둘 생겼지만, 교회는 그 자리를 채울 다른 '열정 있는' 신학생이나 전도사를 찾을 뿐이었다. 소모품처럼 갈려 나가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무명 전도사'들이었다.
결국 나 역시 버티지 못하고 전도사직을 내려놓았다. 영혼을 사랑했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인간적인 모멸감과 깊은 회의감만 남았다. 교회가 말하는 '사역'과 '헌신'이 가장 낮은 곳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희생과 착취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는 참담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회를 보면, 성도들의 감정 쓰레기를 받아내고 실적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웃어야 했던 수많은 '무명 전도사'들의 지친 얼굴과 피눈물이 오버랩되어 괴롭다. 교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