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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망상, 기독교인들은 왜 길거리 집회 광기의 전사들이 되는가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의 바타클랑 극장에서 최악의 테러가 있었던 악몽의 그날, 괴한은 관객들에게 총격을 가하기전 목소리 높여 외쳤다.
“알라후 아크바르! (A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의 이슬람 문구이지만 IS를 비롯한 이슬람계 테러 단체들이 외치는 구호이기도한 이 외마디로 다시 한번 그 존재를 과시한 IS는 또다시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알카에다에서 IS에 이르기 까지 자칭 지하디스트(Jihadist)라 말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들의 테러는, 성전(聖戰-Jihad)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물론 비단 오늘날 뿐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살인과 착취는 인류가 제사의 의미를 처음 깨달았던 까마득한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계속 되어왔다. 이슬람-카톨릭-개신교에서 각종 무속신앙들까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명분을 취했을 뿐 각자의 이권을 다퉈온 역사일 따름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꿈틀거려온 역사의 움직임 그 최전선에는 종교라는 맹목으로 두 눈이 가리워진 청년들의 희생이 있어왔다.
잔인무도한 테러범들에게 ‘희생한다’라는 표현이 적절치 못할지 모르겠지만, 신이라는 이름으로 눈이 먼 그들의 광기는 어딘가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인간이길 포기하고 심지어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나방처럼 그 맹목과 살육의 프레임에 뛰어든다. 그들의 칼날에 스러져간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이 전세계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오지만, 자살 폭탄 조끼를 입은 채 구호를 되뇌이는 청년들의 광기 역시 마음속을 복잡하게 하는 듯 하다. 무엇이 그토록 이런 몸서리치게 무서운 광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으로 전작 ‘이기적 유전자’에 이어 또 한번의 히트를 친 대표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의 맹목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며 ‘만들어진 신’이라 번역된 책의 원제는 사실 ‘신-망상(God delusion)’이다. 정신과적으로 망상(Delusion)이란 ‘문화적 교육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해할 수 없으며, 설득해도 바뀌지 않는 사실과 다른 굳은 믿음’으로 정의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의 정체성에 대해,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게 과학적으로 사유하여 이해할 수 없으며 설득해도 바뀌지 않는 ‘신’에 관한 굳은 믿음, 즉 ‘망상’이라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망상의 ‘설득으로 도저히 바뀌지 않는’ 특성- 그 맹목적 특성이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선동해갈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방향이 잘못된 곳으로 틀어졌을 때에 말이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은 민감한 주제에 대한 무척이나 과감하고 공격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반박 또한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 주제, ‘신은 존재하는가’ ‘종교는 나쁜 것인가’ 등에 대해서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굳이 그러한 논쟁의 중심에 선 그를 언급함으로써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이야기했던 종교와 망상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종교는 망상이다’라는 그의 과격한 주장에서 한 걸음 방향을 틀어 ‘종교가 불러 일으킨 망상’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실제로 무척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음을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실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과대학 학생 시절, 정신과 실습을 돌며 교수님의 외래진료 방에서 참관을 하고 있던 때에 들어왔던 한 남자 환자가 기억이 난다. 조현병을 앓고 있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기도를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천사의 형상으로 내려오시기도 해요. 그 분이 어딜 가든 제가 있는 곳에 함께 해주시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이야기 해주셔요’ 와 같은 이야기들을 교수님께 하고 나갔다. 학생으로 참관하는 입장에서 나로선 조현병이란 것 외에 정확히 그 환자가 과거 어떤 어려움과 고민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여러 정신과 환자들을 처음 보게 된다는 생각에, 환자들 말 하나하나에서 병적인 부분을 찾아내려 샅샅히 훑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환자가 나가고 나서 잠시 짬이 난 사이에 교수님께 ‘저 환자는 아직 환청이나 환시가 조절이 안된 것인가요?’라며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교수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였다.

“우리 교회만 가도 저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수십이야.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 보면서 충만하다는데 그게 환시면 교회사람 다 환자게? 저분은 교회 다니면서 아주 많이 좋아지셨어. 덕분에 힘든 일도 잘 견뎌내고. 잘 지내고 계시네”
그렇게 알쏭달쏭한 그 날의 기억이 남은 채로 시간이 흘러 나는 정신과에 몸을 담게 되었고,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에서 그보다 수없이 많고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엔 정말로 심각한 종교적 내용의 환각과 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도 여럿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분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어요’ ‘메시아가 내려올 거에요.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얼른 가서 남은걸 불로 태워야 해요’에서 심지어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까지. 그들 중엔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공격하여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모친이 성경에 등장하는 악마의 짐승이라는 계시를 받아 어머니를 직접 목 졸라 죽여 수십년 간 정신감호소에서 치료 받은 환자도 있었다. 환자가 이야기하는 종교적 내용의 신념 가운데는 분명히 망상적이고 정신병적인 내용이 있을 때가 있었고, 이는 환자를 파탄으로 이끌기도 했다. 또는 종교적 체험이나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감화가 환자들에게 병을 이기고 세상에 적응하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25년전 이미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y Association)에서는 환자들의 종교적 믿음과 치료자의 종교적 믿음과의 갈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다. 환자의 믿음에 대해 치료자의 특정 종교적-반종교적-이데올로기적 신념을 적용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되며, 환자의 취약성에 중점을 두고 ‘공감’해주어야한 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환자의 믿음에 관련한 고민에 대한 해석은, 그 종교적 믿음이 환자에게 갖는 가치와 의미에 공감적으로 주목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어찌 보면 무척 당연한 이야기이고, 뻔한 이야기를 굳이 거창하게 가이드라인이라고 제시할까 싶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핵심에는 ‘종교적 믿음 자체에 대한 존중’이 녹아 들어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종교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존중한다면 병적 망상과 종교적 신념의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그것의 구분은 바로 환자 자신, 혹은 자신과 관계된 주변에 그 믿음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달려 있다. 그 내용에는 관계없이 말이다. 어떠한 믿음으로 인해 개인이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본인 혹은 주변에 해를 끼치거나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는 중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망상은 바로 그곳에서 싹트는 것이다.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양성증상(psychotic postive symptom)의 병리에 대해서는 복잡한 신경화학적 불균형 등이나 대뇌 구조, 신경회로 이상 등으로 그 생물학적 기전이 상당부분 밝혀져 있다. 하지만 망상이나 환청의 그 내용과 구조 등은, 기저의 생물학적 이상을 증상으로 표출시키는 정신사회적, 정신분석적 요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환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스트레스나 억압된 분노, 자괴감이 생물학적 이상에 의해 정신병적 증상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과대망상의 경우 오랜 기간 억압된 열등감,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책감이 ‘전치(displacement)’되었다고 설명한다. 전치란 어떤 사상, 감정 또는 소망을 더 바람직하고 수용 가능한 다른 사상, 감정 또는 소망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거기에 따르는 걱정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스스로의 열등감은 전치되어 ‘나는 사실 메시아다’ ‘나는 신이다. 사실 나의 명령에 의해 사람들이 조종 받고 있는 것이다’와 같은 과대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사회적, 학업적, 신체적인 결함에 대한 열등감이나 불안감이 억압되면서 이에 대한 ‘투사(projection)’로서 피해망상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보기도 한다. ‘투사’는 개인의 성향인 태도나 특성에 대하여, 관계 없는 다른 대상에게 무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돌리는 심리적 현상이자 방어기제이다. 객관적 현실이나 사회에 대처할 능력이 없음이나 본인의 내적 욕구나 공포, 불안감이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괴롭혀서 그런 것이다’ ‘나를 감시하고 해코지하려하고 있다’ 와 같은 피해망상으로 발전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형태의 방어기제 이지만 생물/유전적 취약성에 동반되는 사회환경적 스트레스는 내적 불안감을 얼마든지 그러한 형태로 표출시킬 수 있다. 억압된 열등감과 내재된 불안감은 극심한 스트레스 앞에서 정신병적 망상으로, 환청으로 표현된다.

다시 앞에 언급했던 공포의 IS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무렇지 않게 죄없는 사람들을 납치하고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무차별하게 총기를 난사한다. 심지어는 본인이 죽음을 불사하고 테러를 자행하거나 온몸에 폭탄을 동여맨채 서슴없이 뇌관을 당긴다.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이 결여된 맹목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자신들이 천국을 약속 받은 지하디스트(성전사)이자 샤히드(shahīd-순교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일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가는 지금, 그들의 이러한 믿음이 망상이냐 아니냐에 대한 진단적 논의는 사실 중요치 않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그들 자신의 목숨과 인간성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망상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정신사회적 논의에 이를 빗대어 보자면- 이는 그들 내면의 파괴된 인간성과 억압된 분노, 불안감이 병적 믿음으로 변형되어 표출된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동지역의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30%에 육박하는 실업률. 그리고 서양사회에 ‘이방인’으로 낙인 찍힌 무슬림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는 유럽과 이슬람의 골칫거리이다. 낮은 사회적 계층의 무슬림들에게는 생존과 정체성의 불안이, 그리고 열등감과 자괴감의 고통이 내재되고 억압된다. 억압된 극심한 스트레스는 현실검증력을 약화시키고 폭발할 듯 부글거리는 그 내면에 왜곡된 코란의 가르침이 불을 당긴다. 분노와 눈물이 담긴 칼끝을 돌려 알라의 이름을 실어 내지른다. 몸부림 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평등과 배고픔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던 꿈 많던 젊은이들은 사회가 억누른 그 꿈을 사회에 다시 투사한다. 그렇게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테러의 최전선에 광기 어린 표정과 불안한 눈빛의 청년들은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매드맥스에서 핵전쟁 이후의 신인류 전사, 워보이들은 ‘발할라(전사들의 천국)’를 외치고 입에 크롬 스프레이를 뿌리며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몸을 내던지고 폭발하는 불 속으로 뛰어든다. 물과 기름, 여자를 독점한 임모탄이 군림하는 사막에서 신인류 청년들-워보이들이 기댈 곳은 8기통 엔진으로 형상화된 임모탄의 엉성한 종교에 대한 광적인 믿음 뿐이다. 하지만, 과연 목숨을 던져 폭탄에 몸을 싣는 그들의 광기는 단순히 8기통 엔진과 발할라에서 기인 것일까. 아니면 그 뒤엔 독재와 배고픔의 고통이 억압되어 있는 것일까.
교황 프란체스코는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절대적으로 참인 종교적 교리는 없다. 미국정신과학회의 가이드라인에서도 언급하였듯 믿음의 형태와 종교의 내용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 없다. 그럼에도 잔인한 폭력과 살육의 이미지가 거듭되며 이슬람은 테러의 종교로, 테러범들은 비윤리적 광신도 악마로 치부되는 비난의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물론 당연히 이 끔찍한 테러를 이어가는 무법단체들에 대한 강력한 대책이 필요함과, 무력적 대항을 불사해서라도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막아야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매드맥스의 워보이 ‘눅스’를 발할라의 믿음에서 구원한 것은 임모탄의 죽음이 아니다. 그가 빼앗겨 왔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붉은 머리 ‘케이퍼블’의 포옹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테러의 이 슬프도록 뒤틀린 믿음의 비극 이면에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아니라 그들을 이 곳으로 내몬 사회의 차갑고 왜곡된 그늘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