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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는온화한 얼굴로 우리 일상에 찾아옵니다
제가 오늘 어느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라는 책의 부제가 '한 인문주의자의 성경 읽기'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전작 5년 전에 나온 전작이라 할 수 있는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라는 책의 부제는 '한 인문주의자의 사회와 교회'였습니다. 즉, 인문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갖고 사회와 교회 성경을 읽어낸 소소한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읽기의 대상은 달라졌지만, 인문주의자 그리고 읽기라는 이 두 지향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 보편화된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안경과 돋보기를 번가라 쓰면서 책을 봐야 되는 이미 노력 버린 우리의 시력도 한몫을 할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읽고 공부해야 한다는 내키지 않는 당위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읽어야 할 것은 실은 텍스트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도 읽고 세상도 읽고 사회 현상도 읽어내는 안목을 갖도록 요구받습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직조해낸 콘텍스트 모두 우리의 읽기의 대상입니다. 일관된 관심은 자식을 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히신교를 책계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중세 가톨릭의 사제들이 독점하던 라틴어 성경을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모로 번역되면서 전 없는 종교적 자의식을 대중들이 갖게 됐습니다. 그 자식은 중들과 유된 엘리트의 것이 아니라 중들의 높이 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개신교와 주체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어를 기반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들을 우리는 통털어서 인문 주의자들이라고 분류. 종교 개혁은, 더는 가톨릭의 미사를 드리는 것을 보던 종교에서 스스로 읽어 내는 종교로의 전환입니다. 종교성 구현의 주체로 일반 그리스도인 대중들이 비로소 역사 속에서 등장.
우리가 흔히 성직주의 등을 벗어 버린다는 것은 대중들이 스스로 신앙을 규정하고 주체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 의미하기도 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매개 없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능력, 즉 책임감을 키우는 것이 종교 계획의 정신. 읽는 능력, 즉 문해력은 단순한 지식의 영역으로 제한되지 않음.
오히려 글이나 사람의 마음과 형편을 읽고 이해하면, 우리는 그에 공감하고 이입. 공부는 타자의 삶 영역에 들어가서 그 느낌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 누군가 아파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거나 문제 해결을 제시하기 전에, 그저 같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상황.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사람들이 호흡하는 속도에 따라 호흡하고 걸음에 맞춰 걸어가는 것.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기쁨, 고통, 즐거움, 슬픔에 대한 공유된 감정이 없다면, 세상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할 것. 공감은 내가 무엇인가를 주도하지 않고 수용, 반응해 주면서 형성되는 관계 매듭.
그리스도인의 공부는 바로 이렇게.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가 아우성치는 그 소리를 듣고 같이 느끼고,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을 키워가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크게는 한 나라, 작게는 한 조직의 리더에게 이러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될 때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경험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게 있지요. 어떤 연민이나 무조건적 공감이 우선되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흔하게 뱉는 '과연 그것이 성경적이 혹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냐' 이런 표현들이 압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호소가 비록 논리적이 못할지라도 그 고통의 몸짓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여전히 감당해야 될 이 지식의 영역. [1]
이것은 단순한 지적인 영역이 아닌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책임감의 지식입니다. 따라서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지적 만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책으로 연결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의 정체성 중에 중요한 것 중요한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 책임감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독일 법대 교수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베르하르트 슐링크 분이 쓴 소설 "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부제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소설인데요, 이 소설은 문맹이었다 한 여인이 그 글을 깨치게 되면서 경험한 주체를 다룹니다. 독일인 한나 슈미트라는 여인은 15살 된 소년 미하엘이 소년을 애인 삼아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 소년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사귀던 여인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6년이 지났습니다. 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제 어느덧 법대생이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수업에 일부러 재판 방청을 하게 됩니다. 그 재판은 2차 대전의 전범 재판이었습니다. 만납니다.
한나는 2차 대전 막바지의 유대인 대학살의 프로젝트였던 최종 해결책이라는 이 대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호성 열차의 승무원이었던 이 한나가 유대인을 방화 불러 태워 학살하는 문서에 서명한 최종 책임자라는 혐의.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던 한나는 이제 재판장이 서명자의 필적을 감정해 보자고 요구했을 때 자신의 서명이 맞다고 인정해 버립니다.
동료들의 책임까지 혼자 뒤집어쓰고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미하일은 한나가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죠.
라 것을 밝히고 싶지 않던 그 자존심을 지킨 결과, 같이 재판을 받은 이들과 비해서 비교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수십년 동안, 미하엘은 한날을 위해 자신이 책을 읽어 준 그 카세트 테이프를 감옥에 보냅니다. 시간이 한참을 흘러 가석방될 때, 교도소에서 미하일에게 한나를 위한 거처와 직장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아, 그래서 가석방 되기 일주일 전에 몇십년 만에 면회실에서 둘이 만납니다. 미하일은 한나가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그 과오를 참여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한나는 미하엘이 원하던 그런 종류의 대답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근데 이 슈링크의 소설은 음, 제가 아주 좋아하는 케이트 윈슬렛이 아는 여배우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아주 짧은 대화로 기록돼 있습니다.
마이클이 물어봅니다, '옛날 생각 많이 했어요? 너랑 있을 때.' '아니요. 재판 전에는 옛날 생각 안 했어. 그럴 필요가 없었지.
지금은요, 기분이 어때요? 내 기분은 중요치 않아. 내 생각도 중요하지 않아. 죽은 사람은 죽은 거니까.' 마지막으로 마이클이 물어봅니다, '배운 게 있을까 궁금했어요?' 한나가 대답합니다, '하나 있지.
그를 배웠지.' 한나는 자신이 그를 배웠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습니다. 미하일은 착하고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가석방 당일, 한나는 자신이 글을 읽던 그 책상 위에 자신이 읽던 책을 포개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목을 매니까. 미아에게 남긴 편지는 결국 '유원인 샘'입니다. 감옥에서 남긴 자신의 재산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녀에게 기부해 달라는 그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감옥에서 읽은 책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남긴 문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책 중에는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슈링크의 소설은 전범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한 한나 아티의 '예루살렘의 아만'을 쳐 보이게 합니다.
링크가 지은 주인공 이름인 한나는 한나 아트에서 가했다고 보통 얘기합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않음으로 혹은 못함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이 악에 가담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이라는 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큰 책임 있는 아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관료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이런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는 큰 논란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저 관료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또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명분 뒤에 아이만을 숨을 수 있는 면죄부를 주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링크는 한나 슈미트를 그렇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한날 슈미트가 문맹이었다 것은 그저 읽을 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과를 인정 않기 위해를 우기를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 록 신을 받지만 읽을 모르고 한 것이기에 그만한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는 것. 그 한는 미이게 내 책들을 들으며로 읽고 쓰고하는를 같 를를.
나는 의는 독방을 한걸음을 내렸다. 의는 것이다. 어는 이렇게 있습니다.
그고 이것을 글에는 맹은 미성의 상태이고 는을 였습니다. 그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책임을지는 성년으로 살겠다는 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면하고자 하는 였기 때문이죠. [2]
그녀가 남긴 책들이 그것을 해줍니다. 그러니 미과 대화에서 그을 배웠다는 말은 이미 주체로서 자신의 과거와 책임과께 마주했다는의 이로 인로 회피하지 않습니다. 한렌트 아만을 시대를지 못하는 문이라는 이유로 악의 본을 흐리게 했다면 링은 문이라는 사실 성이라는 사실이 결코 그 사람이 가질 책임을 줄여서는 안된다고함을 지적했습니다.
이듯 맹과 비을은으로 그를 쓸 수 있냐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여부입니다. 의도적인 오독 선택적 읽기, 편의적 적용, 이런 것등은 우리가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사적인 욕심 때문에 악한 목적 때문에 소통되지 않는 언어와 문자가 일상으로 위장 수.
있습니다. 악이 악한 것은 한 모습 장하기 때이 아닙니다. 악이 정말 악한 것은 평범한 일상의 얼굴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얼굴은 우리가 피할 수 있습니다,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은 늘 정상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악이 드러나면 미쳐 따져보지 못한 사려깊지 못한 실수로 위장하고 합니다.
문맹을 심신미약자이자 미성 행위로 치환하는 것입니다. 한 는다는 것, 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부터의 해방의 걸음이었지만, 그녀의 최종 선택은 죽음으로 속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이 예감 되었기에, 그녀는 섣부르게 읽고 쓰고자 하는 용기를 갖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읽고 쓰는 것은 결코 가볍게 내뱉을 수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문명의 극복이란 주체적 사유와 비평, 판단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과 연결됩니다. 어쩌면 한나 슈미트의 생애 마감은 해방을 행한 가장 극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한나 슈미트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나 슈미트의 그 행위는 읽을 줄 안다고 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 자들을 다시금 역사의 재판정에 울뿐입니다. 스스로기를 배움으로, 한나는 비로서 진정한 독립적인 성이 되었습니다.
그저 기성의 것을 반대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닌, 자율과 책임을 지닌 진정한 근대인 말입니다. 근대인이었던 강하지도 않습니다. 설교단에서 진리라고 선포되는 가치를 수용하고 살아내는 것, 이것이 미덕이 되어 있지요.
결국, 설교단에서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갖춘 설교자의 말과 행동, 사고에 우리 스스로를 동화시켜 나갑니다. 그 일체감은, 일체감이 깊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좋은 구성원에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이 현실은 자칫 자신의 삶과 신앙에 주체성을 상실한 개체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외침을 듣지 못하고 시대와 사회를 읽어나가는 능력을 상실한 문맹이 대량으로 양산될 수 있는 위기가 있습니다. 스스로 읽어내는 힘을 기를 때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회 속의 타자들을 책임지는 자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 주체성과 책임 의식을 갖고 읽어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개인 사회적 트라우마를 마주할 때 손쉬운 답을 찾기보다 그 복잡 다단한 층위를 읽어내는 그 품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한나가 했던 읽고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읽는다는 것, 이것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책임감 같은 어떤 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읽는 것, 공부. 이것을 지식의 문제로 치환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감을 배우지 못하는 공부는 반지성주의를 연결되기 쉽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만큼 실제로 공부 읽기를 강조하는 이 종교는 드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반사회적 반지성적 종교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스테라 사람이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책을 1963년에 썼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반지성주의의 그 기원을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추적합니다. 그는 이른바 1950년대 미국 사회 크게 일어났던 메카시 열풍으로 가시화된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대각성 운동으로부터 빌리 그에 이르는 이 복음지 운동의 결과물이라고 추적하고 비평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메카시 풍이 이유를 미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역 읽어내지. [3]
못하는, 빈약한 역사 의식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반지성적, 반지성 주의라고 부르는 태도와 사상을 묻는 공통의 요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정신적인 삶을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의심, 그리고 생명의 가치를 끊임없이 최소화하려는 성향'.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렇듯 변하는 세상을 읽어내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혐오와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되도 되면서 인간의 삶이나 제도 사회 운동이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을 막아섰습니다. 호프스테더이 메카 시점으로 대표되는 악의적인 형태의 반지성주의. 우리 이거, 누구나 다 어, 인식할 수 있는 이 반지성주의 못지 않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형태로 미국 속에 빠지고, 미국 문화 속에 퍼져 있는 반지성주의 위협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반지성주의를 가진 사람은 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죠. 대게 그 사람들은 순수하거나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이나 사상에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반지 성주에 쏠린 사람들은 무죄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의 높은 사람들이고, 그것을 진지하게 추구하고 어떤 사회적 목적 의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라고 우리 예상을 빗나간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반지성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매우 많고, 자신의 어떤 신학적인 견해나 정치적인 견해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지성주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지식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광신도가 있지만, 광신의 본질은.' 종족 혹은 집단적인 결함입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성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헌신적이고 진하더라도, 그 지성을 어떤 제한된 선입관 또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으로 축소할 때, 지성은 광신 주의에 삼집. 지성에 대한 헌다 더 위험한 것은 어떤 제한된 사상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신학교에서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똑같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즉, 너무 축소된 준거 틀 내에서 과도한 경건으로 인해 지적 기능이 압도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종교 내부자가 아니라 종교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데요. 이런 반지성주의를 넘어서는 해법으로, 경건의 균형감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즉, 경건이 지나치게 경직된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가진 논리적인 특성, 유희적인 특성에 어떤 집중할 것을 얘기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지적인 활동은 어떤 경직된 진리를 붙들고 맹목적으로 그 틀을 추정하는 것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는 오히려 정신적인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지적 활동 자체가 오픈돼 있고, 그 지적 활동에서 우리가 순수하게 기쁨을 누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지식은 갇힌 지식이 아니라 확장될 수 있고, 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경 되지 않고, 이 사회와 상호적인 관계 맺음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지식인이라 사람이 가졌던 사회적 신뢰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미디어를 개인이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파편화된 반지성의 소리를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접합니다. 그렇죠, 반지성이란 지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움직임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적 정치적인 확신을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반지성주의를 넘어서는 해법, 이게 좋은 '지성'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신들이 타협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기존의 배움을 멈춰서 되돌아보는 것,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지성주'를 극복하기 위한 공부는 새로운 '지성', 올바른 지성의 한명이 아니라 사회적 감성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사회적 책임감을 실천하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 그 공부는 결국은 자기 만족에 머물거나 반지성적인 광신 혹은 선동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데서 발아되는 언어들은 반향 없이 허공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나 슈미트의 사례 보듯, 결국, 읽히란 무엇입니까? 사회적인 책임감, 사회적인 감성입니다.
정 공부는 그러므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교회는 사실은 양가적 가능성을 가진 집단입니다. 자칫 교회에서 시도하는 무수한 성경 공부와 지적인 활동이 이런 사회적인 감수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감성의 매 말은 지성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반지성주의의 선두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무슨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거나 기술적 지식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군가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흘릴 수 있고, 지구가 아했을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과 책임감을 갖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읽기와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4]
제은 이해. 보자면은 세우고 뼈대를 세워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안전하고 평안하게 보호 받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인문학적 작업은 할 수 있는 한 울타리를 넓혀가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사유의 폭을 극단으로 확장해서 경계를 넓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는 사람들의 여러 다양한 사고와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이땅에서 하나님 상을 지는 사람들의 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새겨진 의를 사람의 문 인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라는 맥락에서 인간을 새기는 이 인문의 작업은 자칫 하나님의 존재를 벗어나고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오해받 합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관점으로, 인문주의의 관점으로는 우리의 기와 리의 공부는 하나 주신 상실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존엄을 회복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밑걸음이 작업입니다. 저는 우리의 읽기가 어떤 틀 안에 가두지 다 조금은 더 용감하게 확장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책이 그런 고민을 하는 풀어나가는 조그마한 길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
강연에서 말하는 지식 획득의 구체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식 획득의 목적
책임감 있는 지식: 단순한 지적 만족이 아닌, 사회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는 책으로 연결되는 지식 [38].
주체적인 사고: 맹목적인 수용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책임질 수 있는 능력 함양 [102].
사회적 감수성 함양: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목소리에 공명하며,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는 것 [132].
인격의 존엄성 회복: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것 [192].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 단순한 객관적 지식이나 기술적 지식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 [181].
반지성주의 극복을 위한 공부
새로운 지식 습득뿐만 아니라 사회적 감성을 키우고 사회적 책임감을 실천하는 것 [174].
기존의 배움을 멈춰서서 되돌아보는 것 [173].
지적인 활동 자체를 즐기고 확장하며, 사회와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 [164].
A watercolor painting in soft, muted tones depicting a person sitting at a desk, surrounded by stacks of books. The individual is gazing out of a window, seemingly lost in thought, with a gentle, contemplative expression. The room is filled with warm light, and the overall atmosphere is peaceful and serene.
책임감과 연결되는 읽기
개신교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인 '읽기'는 책임감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함 [40].
문해력은 단순한 지식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과 형편을 읽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능력 [21].
공부는 타자의 삶의 영역에 들어가서 그 느낌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 [23].
한나 슈미트 사례
문맹을 극복하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은 주체적인 사유와 비평, 판단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과 연결됨 [115].
자신이 저지른 죄로부터의 해방의 걸음이자, 주체로서 자신의 과거와 책임을 마주하는 것 [112].
이러한 목적들은 지식 획득이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감과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