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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무나 기도하죠? 과거엔 달랐습니다 (김학철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김학철 교수님과의 대담을 통해 주기도문의 의미를 깊이 해부하고 재조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주기도문의 각 음가 단위까지 분석하며 그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탐구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가 가르친 기도이며, 그 기도를 가르치게 된 배경에 대해 두 가지 추측이 제시됩니다. 첫째는 당시 제자들이 기도를 엉망으로 했거나, 둘째는 기도를 아예 안 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주기도문을 전하는 상황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 차이도 언급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잘못된 기도의 행태들을 비판하며 올바른 기도를 가르친 맥락에 초점을 맞추고, 누가는 공동체의 경계를 세우는 기도의 강조점을 가진다고 봅니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올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다른 기도를 잘못하는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될 것이므로 서로 연결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경건의 행위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자선, 기도, 금식.
- 자선은 하나님이 만물을 돌보는 사랑의 마음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받은 것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입니다.
- 금식은 신의 뜻 외의 잡스러운 것으로 가득한 마음을 신의 거룩함으로 비우려는 노력으로, 삶에서 '뺄셈'을 통해 쓸만한 그릇을 만드는 차원입니다. 노자의 "쓸모 있는 것은 빈 곳이다"라는 말과 연결하여 빈 곳이 있어야 컵이 쓸모 있듯이 자신을 비워야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 기도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 행태를 비판하셨습니다:
- 자랑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하는 기도: 자선이나 금식을 할 때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처럼, 기도할 때도 멋지게 보이려 사람들 앞에서 하는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 대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기도의 초점을 자신의 내면으로 옮기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내면의 종교입니다. 사람들 눈을 의식하는 명예와 수치의 가치 대신, 자신의 내면과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하는 시간을 신과 함께 가지는 것이 기도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자신조차 마주하기 싫은 부끄러운 내면을 신과 더불어 마주하며 탐구하는 가치이며, 종교, 철학, 문학이 인류 사회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때는 남들이 용서해 줄 만한 '6위 정도 되는 잘못'을 고백할 가능성이 높지만, 혼자 있을 때는 진짜 잘못을 고백하게 된다는 예시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주기도문의 각 구절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는 친근하지만 '하늘에 계신'은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이는 신앙의 대상이 친근함과 동시에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고대 세계의 기도는 신을 부르고, 놀아주고, 거래하고, 속이는 조작적, 거래적 성격이 있었지만, 주기도문의 첫 구절은 신적인 존재를 특정한 말의 힘으로 얽어매려는 대상이 아님을 말합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모욕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심지어 신성한 납세 의무와 같이 동원하기 힘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제국과의 전쟁에서 땅에 떨어졌으며, 하나님이 세상 창조, 이스라엘 백성 선택 등의 기획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더럽혀진 이름을 하나님 스스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이는 흩어진 디아스포라, 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인류 대표자가 된 우리들을 회복시켜 신의 뜻을 구현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승리에 우리가 동참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는 통치입니다. 신이 직접 통치하시기를 바라는 청원이지만, 이는 단순히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십계명, 신약 성경의 주기도문, 교회사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같이 기독교 재건에 필수적인 가치로 비유하며 주기도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땅)에 오기를 바라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믿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대표자로서 신의 통치에 참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말합니다. 육체적, 사회적, 개인적 고통 등 역사적, 실존적 질고에서 우리를 건져내 달라는 청원이며,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므로 신의 전능성과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절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통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의 마무리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빵을 달라는 현실적인 요청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언어는 평범한 언어에 종교적 깊이를 더하므로, 이는 단순히 밥 달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에피 우시 오스'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단어로, '절실히 필요한 오늘 것'을 의미한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 운동의 제자들이 돈이나 여벌 옷 없이 돌아다니며 하늘나라 운동을 확장하고 지역의 동조자들과 연대하여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맥락에서 해석됩니다. 제자들은 돌아다니면서 하루치 밥을 통해 연대를 확인하고 서로 지지해 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이집트 탈출 후 광야에서 매일 하루치만 공급받았던 만나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따라서 이는 재산을 쌓는 대신 매일 필요한 것만 구하고 나머지는 나누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신의 통치와 정의를 믿고 나선 사람들이 상호 연대와 부조 시스템을 통해 의식주가 채워지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오펠 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그 첫 번째 뜻은 **'빚'**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죄라는 말이 쓰이지만 마태복음은 빚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빚'은 고대 사회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빚 문서를 태울 정도로 절실하고 명확한 개념이며,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거나 가족을 팔아야 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죄는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할 수 있지만, 빚은 날짜가 다가오면 절절매는 것처럼, '빚'이라는 말을 통해 죄의 무서움을 알리는 동시에 일상의 언어에 종교적 의미를 실은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듯이 하나님 우리의 빚도 탕감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욤 키푸르(대속죄일) 전통과 연결됩니다. 욤 키푸르 전에는 서로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 주는 행위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삶의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서로 상처주고 경쟁심을 느끼기 쉬운 공동체에서 이러한 용서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 내에서 용서의 덕목을 강하게 가르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일반적으로는 시련이나 유혹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조'는 **테스트와 템테이션(유혹)**의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집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테스트를 의미하며, 특히 예수 운동의 제자들이 로마 지배 체제나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하는 활동을 하며 겪는 박해와 어려움, 즉 악한 세력이나 사람들로부터 오는 시련의 때에 견디지 못하는 시험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절절한 탄원으로 해석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지만, 이들이 예수 운동에 참여하며 네트워크를 만들고 예수를 왕으로 고백했기 때문에 겪는 시련들입니다. 회당에서 축출 당하는 것과 같이 멤버십 박탈은 큰 어려움이었으며, 이러한 악한 사람들과 시련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주기도문은 절박한 청원만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기도문 뒤에 붙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대게(For)로 시작하는 송영은 원래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청원만 하는 것이 미안하거나, 성찬 의식 후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하늘의 은혜를 입었으니 감사와 찬양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주기도문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통치가 임하며 뜻이 이루어지는 데 참여하겠다는 의지, 공동체 안에서 상호 연대하고 나누며 지지하는 삶, 그리고 서로 용서하고 악한 시련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구하는 공동체적이고 실천적인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상에서는 내면의 성찰과 옹글고 단단한 내면을 가진 교양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전문가나 공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내면이며, 종교, 문학, 철학은 이러한 성찰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보다 기독교적 정신, 즉 중요한 가치들을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대학에서 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지성인을 키워내는 것이 목적임을 밝힙니다. 이는 주기도문이 강조하는 내면으로의 초점 이동과 연결되는 통찰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k5hSnKBa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