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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나? 전지적 십일조 시점
십일조(什一助)의 역사적 흐름과 영향
이 영상은 '하인 법칙(Hain's Law)'에 따라 하나의 큰 사건 뒤에는 수많은 작은 사건과 징후들이 있다는 전제하에, 종교의 십일조가 역사에 가져온 변화를 '전지적 십일조 시점'에서 흥미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십일조 외에도 다양한 요인들이 역사 변화에 기여했음을 인정합니다.
1. 십일조의 기원과 유대교 내에서의 변질
- 구약성경에서 시작: 십일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공동 경전인 구약성경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수확물의 10분의 1을 사제에게 바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초기 목적: 일반적으로 구약의 십일조는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들의 생활비와 의식 비용, 그리고 고아, 과부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 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유대교의 부패: 십일조가 점차 의무화되면서 교회에 돈이 넘쳐났고, 유대교는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들은 "십일조를 잘 내면 1년간 치유 형벌이 면제된다"며 납부를 부추겼는데, 이는 중세 면제부 판매의 잉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유대교 회당에서는 헌금을 통해 종교적으로 금지된 고리대금업이 공공연히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 기독교의 탄생 배경: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국가 세금 외에도 교회의 십일조와 신전 건축 및 보수 비용을 수시로 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고, 예수를 따르던 유대교인들이 결국 새로운 교회(기독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2.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십일조의 '숨기능'
- 생존을 위한 변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길드에도 끼워주지 않아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습니다.
- 무역과 환전의 성공: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환경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았습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지인 및 친척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거래처가 되어주었으며, 이는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 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는 데 유리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기축통화가 없어 각국 화폐를 환전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또한 유대인들이 담당하며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 금융 기법 발전: 무역과 환전으로 이익을 얻은 유대인들은 대부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상 이자 받는 행위가 금지되었기에 유대교인들이 그 역할을 맡게 된 측면도 있었는데, 이들이 개발한 금융 기법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복잡한 금융 시스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 '십일조' 문화의 진화: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무역과 대부업을 할 수 있었던 뜻밖의 요인은 십일조의 숨기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처럼 기부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고, 이 기부금은 융자 제도로 발전했습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 이 신용 대출을 통해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세계 각지에서 빠르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3. 기독교 내 십일조의 부활과 강제화
- 초대 교회의 자발적 모금: 베드로, 사도 바울 등 초대 교회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논의가 없었고,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발적인 모금만 있었습니다.
- 강제적 세금으로의 전환:
- 4세기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십일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6세기 마콘 공의회에서는 기독교도의 의무가 되었고, 내지 않으면 교회 출입 금지 및 파문까지 당할 수 있었습니다.
-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를루스 대제는 모든 국민이 교회의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선언하여, 십일조는 아예 **강제적인 세금(교회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신고가 맞는지 증인을 내세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 유럽 전체로 확산된 교회세: 이 교회세는 곧바로 유럽 전체의 기독교 국가로 확대되었고, 가톨릭의 폭발적인 팽창을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교회를 만들면 징수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교회의 사유화와 폐해: 사제와 귀족이 결탁하여 교회가 곳곳에 들어서며 기독교 전파에 불이 붙었습니다. 교회로 이권과 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되자, 특히 재산 상속이 안 되는 차남 이하의 귀족들이 돈으로 성직을 사들여 교회의 사유화가 본격화되었습니다. 교회세를 거두는 세력권을 두고 교회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자기 지역의 십일조 징수권을 채권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이 채권을 샀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4. 십일조와 식민지 개척, 그리고 왕실 재정난
- 식민지로 향한 성직자들: 유럽 교회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성직자와 귀족들은 "블루오션"인 식민지로 향했습니다.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성직자들이 정복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로 진출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포교를 명분으로 수탈과 학살극이 벌어졌습니다.
- 민중과 왕실의 고통: 교회는 날마다 부유해졌지만,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습니다. 특히 소득에 상관없이 수입의 10분의 1을 내야 하는 교회세는 가난한 자들에게 더 큰 부담이었습니다. 각국의 왕들도 사정이 어려웠는데, 이미 교회에 세금을 낸 시민들에게 추가 세금을 걷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의 왕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호화로운 궁전 유지로 인해 늘 세수 부족과 파산 위기에 시달렸습니다.
5. 십일조 문제 해결을 위한 유럽 왕들의 노력
- 프랑스의 과격한 방법: 14세기 초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교황이 프랑스 교회령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자, 프랑스 출신 교황으로 교체하고 교황청까지 아비뇽으로 옮기는 **'아비뇽 유수'**를 단행했습니다.
- 영국의 과감한 선택: 16세기 영국은 아예 영국 성공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교회 재산은 물론 십일조까지 모두 왕이 소유하도록 했습니다.
- 스페인의 몰락: 스페인은 이슬람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가 되어 교회세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오랜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왕실 재정은 형편없었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 각종 거래 물품에 소비세를 부과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독립하기도 했습니다.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에서 어마어마한 은이 들어왔음에도 대부분 빚 갚는 데 탕진되었고, 결국 십일조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스페인은 전성기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몰락했습니다.
6. 종교개혁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십일조의 소멸
- 종교개혁의 도화선: 면제부와 함께 중세 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이었던 십일조는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철퇴를 맞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가 십일조를 포함한 그 어떤 헌금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십일조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과 왕들이 개신교로 개종했기에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프랑스 대혁명으로 종결: 프랑스 대혁명은 십일조 폐지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교회세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커서 혁명 기간 내내 교회는 성난 민중들의 주요 약탈 대상이었고, 수만 명의 성직자들도 희생되었습니다. 혁명 정부는 교회세 폐지는 물론 교회 재산 몰수를 통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정교분리를 가져왔습니다.
- 19세기 유럽의 변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력이 퍼지면서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십일조 강요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7. 21세기 한국 교회의 십일조 부활
- 흥미롭게도, 21세기에 종교개혁을 불러왔던 가톨릭조차 강요하지 않는 십일조가 루터와 칼뱅을 따른다는 한국 교회에서 부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x7qxnhLc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