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기독교)는 왜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로 갈라졌을까?
제공해주신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기독교)가 1054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완전히 갈라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로마 제국 내 확산 및 공인
- 그리스도교는 약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 로마 제국에서는 네로 황제에 의해 큰 핍박을 받았고, 이때 예수의 첫 제자인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했습니다. 핍박의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확산세는 무서웠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했습니다. 이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헬레나(성녀로 추대됨)의 영향이 컸습니다.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드로의 시신이 묻힌 장소에 성당을 짓게 했는데, 이 성당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새로 지어져 1626년에 완공된 성 베드로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참여).
- 313년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급부상했고, 로마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 수도 이전과 로마 제국의 분열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를 종교 중심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수도를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인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으로 옮겼습니다. 새로운 수도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습니다.
-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으나, 로마 교회는 로마에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며 주도권 다툼이라는 미묘한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 이후 그리스도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됩니다.
-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기 직전 로마 제국을 동로마 제국(큰아들 아르카디우스)과 서로마 제국(둘째 호노리우스)으로 나누었고, 395년에 로마 제국은 둘로 나뉘어 다시는 합쳐지지 않았습니다.
- 이로써 로마 제국 내 황제가 두 명이 되고,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두 곳으로 나뉘게 됩니다.
3.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로마 교회의 변화
-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 이 시기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 5곳이었습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 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중심지 역할을 하며 동쪽 교회들과는 조금씩 다른 예배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 395년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쪽의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은 로마 교회를 향해 "정통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스스로를 정교회(정통을 뜻하는 오르토독스에서 유래)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로써 로마 교회는 로마 가톨릭으로 불리게 됩니다.
4.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차이점 (현재 시점) 자료는 현 시점을 기준으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주요 차이점을 언급합니다:
- 교황 수위권: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만, 정교회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 예배 중 반주: 로마 가톨릭은 예배 중에 반주를 사용하지만, 정교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 사제의 독신: 로마 가톨릭 사제는 독신이지만, 정교회는 결혼한 남성도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 원죄 사상: 로마 가톨릭은 원죄 사상을 인정하지만, 정교회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 구약 성경 권수: 로마 가톨릭은 구약 성경이 46권이지만, 정교회는 49권입니다.
5. 분열을 심화시킨 주요 사건들
- 프랑크 왕국과의 유대 강화: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로마 가톨릭은 비잔티움 제국에 의지하는 대신, 486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의 클로비스가 세운 프랑크 왕국에 의지했습니다. 클로비스가 그리스도교(삼위일체를 믿는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면서 로마 가톨릭은 프랑크 왕국과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과 정교회의 시선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 성상 파괴령 (726년):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 황제는 예수, 성모 마리아, 성인 등의 조각상을 우상 숭배로 보고 파괴해야 한다는 성상 파괴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은 미개한 게르만족 교화를 위해 성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때부터 동쪽 교회와 서쪽 교회의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 필리오케 논쟁 (8세기):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어 신약성경 원문에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는 구절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바꾸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 레오 3세가 번역상의 오류를 인정하고 그리스어 원문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 서로마 제국 부활 및 황제 대관식 (800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하던 로마 가톨릭은 800년에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며 그를 "부활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은 프랑크 왕국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최종 분열 (1054년): 11세기에는 8세기에 있었던 필리오케 논쟁에 대한 앙금이 되살아났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예배 의식에 변화를 주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로마 가톨릭을 지적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에 로마 가톨릭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로마 가톨릭 교황이 최고의 존재임을 승인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양측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054년에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는 각자의 독자 노선을 걷게 되며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